영화 <더 디그>의 배경
영화 <승리호>가 연일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넷플릭스에는 이 영화 말고도 최근에 개봉한 볼만한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더 디그>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가 아무래도 '고고학 영화'인지라 저는 개봉 전부터 많은 관심을 갖고 '개봉하자마자 봐야지'라고 다짐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넷플릭스에서 공개된지 일주일이나 지나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죠. 뭐랄까 일종의 부담감 때문인데, 언젠가부터 '고고학'과 얽힌 것들이 마냥 재미있게만 봐지지 않는 '못된 습관'이 들었습니다. 즉 놀려보고 보는 건데, 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제가 갑자기 일을 하고 있더라는.... 같은 이유로 이미 수개월 전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다큐멘터리 <사카라 무덤들의 비밀>도 계속 시청을 미루고 있는데, 설 연휴 때는 꼭 봐야지라고 다짐해봅니다.
<더 디그>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스토리도 상당히 매력적이고, 영화의 만듬새도 꽤 훌륭하며, 특히 장면 장면 등장하는 무미건조한듯 펼쳐져 있는 잉글랜드 특유의 풍광과 미니멀한 음악이 잘 어울어져서 2시간짜리 뮤직비디오 같은 느낌도 있으니, 혹시라도 설날 연휴 때 볼 영화를 찾고 계시고 있다면 이 영화를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영화의 원제 <The Dig>를 그냥 음차한 한국어 제목 <더 디그>는 상당히 아쉽습니다. 이 제목만으로는 쉽게 무슨 내용의 영화인줄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니까요. 영화의 배경의 되는 '서튼 후' 역시 한국인 관객들한테는 썩 친숙하지는 않을테니, <어떤 발굴 이야기>나 <고고학자들>, <어떤 고고학자들> 이런 식으로 제목을 조금 더 직관적으로 다듬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영화는 1939년에 있었던 '서튼 후 유적'의 최초 발굴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서튼 후 Sutton Hoo는 영국 동부 해안의 서포크 Suffolk에 있는 자그마한 마을로, 이곳에서는 서기 7세기 초반으로 편년되는 섹슨 Saxon 시대의 '배 무덤'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적이 발견되기 이전에는 주로 이보다 후대인 바이킹 관련한 유적들만 발견되었었기 때문에, 이 서튼 후 발굴은 고고학자들-고대사학자들이 잉글랜드의 중세 초기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화에서는 "This is Anglo-Saxon!" 이라고 한 등장인물이 외치는 대사가 나오는데, 그 대사는 이 발굴의 학사적 의미를 한 문장으로 축약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배 무덤'이 확인된 곳은 3미터 높이의 둔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둔덕 아래에서 발견된 '배 무덤'의 배는 길이가 27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습니다. 물론 그래봤자, 이것보다 대략 3000년 정도 앞서서 만들어진, 대피라미드 바로 옆에서 발굴된 쿠푸의 '태양의 배' 보다는 훨씬 작지만.... 크크크, (이집트 쪽 배는 길이가 대략 44미터입니다.) '배 무덤'은 배 하나를 통채로 일종의 목관으로 사용한 무덤이라 할 수 있는데, 아래의 동영상을 보시면 '배 무덤'이 어떤 것인지 보다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덤에서는 많은 양의 화려한 부장품들도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검의 자루, 망토 걸쇠, 허리띠의 버클 등도 있었고요. 그밖에도 은접시, 뿔 모양의 잔, 접시, 투구, 청동 그릇, 방패, 갑옷, 가죽신, 가죽 가방 등도 함께 확인되었습니다. 부장품들의 원산지는 무척 다양한 것으로 확인되었는데, 예컨대, 북유럽이나 비잔틴 제국, 심지어는 동지중해 지역 등에서 온 물건도 있었습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이 속해있던 섹슨 사회가 유럽 변방에 있는 고립된 야만족의 땅이 아니라, '중세세계체계'의 일원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죠.
무덤에서는 특히 메로빙거 왕국에서 주조한 금화도 발견되었는데, 이 금화는 이 무덤을 7세기 초중반의 것으로 편년 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무덤에서는 어떠한 기록도 확인되지 않아서 무덤 주인의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었지만, 대략 이스트 앙글리아 왕국의 레드왈드Rædwald 왕(재위 서기 599-624년)이 무덤 주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정을 해볼 수는 있습니다.
이 무덤의 발굴 과정 속에서는 느슨한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것이 서튼 후 발굴 과정이 소설로도 쓰여지고, 또 다시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배경이 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다 실존 인물입니다.
유적지가 있는 곳의 땅 주인이었던 에디스 프리티는, 어린 시절에 이집트와 인도 등으로 여행을 다녀온 경험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영지 내에서의 고고학 발굴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에디스 프리티 역을 캐리 맬리건이 맡았는데 [첨부 사진], 으허.... 제가 이 배우의 팬인지라 아이패드 스크린을 뚫어지라 집중해서 봤고요, 원래는 니콜 키드먼에게 갈 역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리봐도 키드먼 보다는 맬리건이 더 잘 어울릴 수밖에 없는 역할.... 제가 키드먼의 팬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3 명의 고고학자가 등장합니다. 바질 브라운, 찰스 필립스, 그리고 페기 피고트가 그들입니다.
이 가운데 바질 브라운은, 이 지역 출신의 '현장에서 경력을 쌓은 고고학자'입니다. 그는 영화 속에서 자신은 발굴자excavator라고 소개하지만, 발굴은 고고학의 근간이 되는 과정인 만큼, 능숙한 발굴자는 충분히 고고학자로 여겨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더욱 더 그렇고, 당시에도 그랬겠지만, 아카데미아 출신이 아닌 현장 고고학자에 대해서 좀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그래서 브라운의 공로는 오랫동안 인정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서튼-후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는 영국 박물관에 가보시면 나중에 유물들 기증은 에디스 프리티의 이름과 함께 바질 브라운의 이름이 큼지막하게 쓰여져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39년 보다 17년 전인 1922년의 일이지만, 이집트에서 투탕카멘 무덤을 발굴해낸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 역시도 학위가 없는 '현장형 고고학자'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에서도 에디스가 카터가 쓴 <The Tomb of Tutankamen>을 보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어로도 번역이 되었으면 혹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찾아보세요. 흐흐흐,
찰스 필립스는 바질 브라운과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인데, 아카데미아에 배경을 갖고 있는 고고학자였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중년의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로 나오는데, 실제의 그는 당시 30대 후반의 나이여서 오히려 50대인 브라운보다 연하였고, 정확하지는 않은데 그가 케임브리지와 뭔가 연이 있기는 했지만, 교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그렇지만 '아카데미아 출신 고고학자'인 필립스가 현장의 지휘를 맡게 되면서 처음에는 '학위가 없는 현장형 고고학자' 브라운과 갈등이 좀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그런 내용들이 브라운의 일기에도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여성 고고학자인 페기 피고트 역시 실존 인물입니다. 영화에서는 다소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그려지는 것이 살짝 불편하기는 했는데, 실제로 피고트의 성격이 어땠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고, 다만 그가 금으로 만들어진 유물들을 현장에서 최초로 발견한 발굴자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서튼 후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애초에는 땅 주인이었던 에디스 프리티의 소유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프리티는 후에 모든 유물을 영국 박물관 British Museum에 기증합니다. 에디스 프리티는 원래 건강이 안좋았던 터라, 서튼 후 발굴 이후 3년인가 4년 후에 사망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서튼 후 유물은 모두 다 영국 박물관에서 만나보실 수 있는데, 특히 '투구'가 유명합니다. 이 투구는 언제나 영국 박물관을 대표하는 유물들 가운데 하나로 거론됩니다. 게임을 좀 하셨던 분들 가운데는 이 투구를 KOEI사의 <대항해시대 3>를 통해서 처음 알게되셨던 분들이 꽤 많습니다.
언젠가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은 영국 박물관의 입장료가 공짜인 것은 전시품이 모두 다 외국에서 가져온 도굴품이기 때문이다라고 방송에 나와 당당하게 말한 적이 있는데, 이건 좀 많이 몰지각한 이야기입니다. 애초에 영국 박물관의 소장품들 가운데는 도굴품이 아닌 유물들도 아주 많고, 또 서튼 후의 유물 같은 전시품들은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대표적인 '잉글랜드 출토' 유물입니다.
제가 섹슨 시대 전공자는 아니지만, 알고 있는 상식에 비추어 볼 때 영화의 고증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발굴장의 모습이나, 출토 유물들, 특히 흔적만 남아 있는 배를 재현해 놓은 것이 정말 정교했습니다. 그래서 좀 찾아보니 역시 영화의 프로덕트 디자이너 마리아 듀코비치와 미술감독 카렌 웨이크필드이 서튼 후 유물 담당 큐레이트와 여러 차례 미팅을 가지면서 도움을 받았고, 바질 브라운 역을 맡은 배우 랄프 파인즈 역시도 여러 차례 박물관을 찾아서 '바질 브라운'이라는 인물과 서튼 후 유적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고 하더군요.
아무쪼록 즐거운 영화가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