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거나 이집트 이야기 #1
1248년, 프랑스 왕 루이 9세 주도하에 제7차 십자군이 결성됩니다. 그런데 이때 결성된 십자군은 성지 탈환을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직접 진격한 것이 아니라, 좀 뜬금없이 이집트로 진격 합니다. 당시 이집트는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아이유브 왕조(Ayyubid dynasty)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이유브 왕조는 3차 십자군 전쟁의 주인공이었던, 보통은 ‘살라딘’이라 불리는 살라흐 앗 딘(Salah ad-Din, 1137-1193년)이 1171년에 이집트에 세운 왕조입니다.
십자군은 나일강 동쪽 지류의 하구에 위치하던 다미에타(Damietta)를 점령하는 등 서전은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그러나 나일강을 따라 카이로로 진격하는 중 얼마 못가 만수라(Mansoura)에서 괴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합니다. 이쯤되면 5차 십자군 때의 상황과 완전히 똑같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5차 때는 쉽게 무너졌고, 7차 때는 ‘그래도 좀 저항을 하기는 했다’는 차이 정도랄까요.
만수라는 1219년 아이유브 왕조의 4대 술탄인 알-카밀이 세운 도시입니다. 원래는 그곳에 있었던 마을 이름을 따서 알-비시타미르나 알-바다마스 등으로 불렸지만, 5차 십자군에 대한 이곳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도시의 이름을 만수라(Mansoura,المنصورة), 즉 "승리"라고 바꿉니다. 저도 만수라에 좀 추억이 있는데, 예전에 영국팀과 이집트에서 텔 무투비스(Tell Mutubis)라는 곳에서 발굴을 할 때 공동조사를 진행하던 것이 바로 만수라 대학팀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만수라 대학을 실제로 방문하기도 했었죠.
아무튼, 7차 십자군은 만수라에서의 패배로 지휘관급이었던 루이 9세의 동생 로베르 백작이 사망하고, 총사령관 루이 9세를 비롯한 거의 모든 간부들과 생존한 기사 및 병사들 대부분은 이집트 측의 포로가 됩니다. 이후 루이 9세는 모든 포로의 몸값이 준비되는 동안 4년 가까이 이집트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 왕을 따라 참전했던 모든 십자군들도 왕과 함께 이집트에서 포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삽화가 구스타프 도레는 18세기에 출간된 조셉 미샤의 <십자군 이야기>에 수십장의 화려한 삽화를 그리는데, 첨부한 사진은 그 그림들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애석하게도 게티 이미지의 워터마크가 들어간 사진 밖에 찾지 못했지만....
이 그림 속에서는 이집트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유럽의 기사들이 역시 종군하고 있었기에 함께 포로가 된 기독교 성직자를 둘러싸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아마도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그 장면을 분명하게 다른 복식을 하고 있는 이집트인들이(이때의 이집트인들은 ‘고대 이집트인’은 아니고 ‘중세 이집트인’이라고 할 수 있겠죠.) 멀찍이서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이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장소가 ‘고대 이집트의 신전’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고대의 신전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은 극히 적겠지만, 한편으로는 고대의 신전들이 후대에 기독교 교회나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기도 했던 것을 감안하면 신전에서 이러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장면은 그림이 그려지던 19세기 서유럽에서 ‘상상되던 이집트’가 그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테죠. 고대 이집트와 중세의 기독교, 중세의 이슬람, 그리고 근세의 서유럽을 동시에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그림입니다.
덧; 제가 전공으로 삼고 있는 ‘고대 이집트’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이집트와 관계가 있는 이야기에는 <어쨌거나 이집트 이야기>라는 제목을 붙여서 써나가려고 합니다. 그래봤자, 다들 별 관심은 없으시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