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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민수 Dec 28. 2020

번역의 문제

<고대 지중해 세계사 - 청동기 시대는 왜 멸망했는가?>의 번역 오류들

* 2018년 12월 27일, 페이스북에 썼던 게시물을 옮겨옴


이집트 신왕국을 쇠퇴시키고, 히타이트나 아시리아 같은 제국들은 멸망에까지 이르기까지 이르게 했던 청동기 시대 후기 동지중해 세계체계 내에서의 역사적 변동에 관해 쓴, 에릭 클라인의 <1177 B.C. - The Year Civilization Collapsed>는 정말 재미있고 훌륭한 책이다. 여태껏 서너차례나 지인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했을 정도로 이 책의 독서는 나에게 인상적이었다. 2014년에 출간된 이 책의 한국어 번역은 <고대 지중해 세계사 - 청동기 시대는 왜 멸망했는가?>라는 제목으로 2017년에 이루어졌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의 번역 소식에 좀 기뻤던 기억도 있다. 

그 한국어판을 이제야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대략 절반 정도 읽었는데, 번역 자체가 나쁘지는 않은 편이고, 이미 한번 영어 원전으로 정독했을 뿐더러, 개인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아주 친숙한 이야기들인지라 무척 잘 읽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법한 자잘한 실수들과 오역들이 꽤 빈번하게 눈에 띈다. 자잘한 실수들이라는 것들은, 예컨대 이라크를 이집트라고 써놨다거나, 1922년을 1992년이라고 해놓은 '오타 수준의 실수'다. 


그리고 오역들도, 번역자라면 응당했어야 할 원전의 내용에 대한 기초적인 수준의 리서치만 있었더라면 나오지 않았을 것들이다. 번역자가 언제나 전문적인 지식을 가져야할 필요는 없겠지만, 번역가는 책임감을 갖고 번역하는 내용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공부는 해야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 기초적인 공부가 어렵다고 한다면, 관련 전공자에게 감수를 맡기는 것도 필요하다.


번역서를 대략 절반 쯤 읽은 이 시점에서 확인한 오역들은 이보다 더 많기는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들만 몇 개 소개해본다.


1. 원전에는 'First prophet of Amun'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번역서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엉뚱하게 '파라오 아문 시기 최초의 예언자'라 번역해놨다. First prophet of Amun은 고대 이집트의 신관 직위명 가운데 하나인 만큼, '제 1 아문 사제' 혹은 '1급 아문 사제' 정도로 번역해야 한다. 갑자기 '파라오'가 번역에 등장한 것도 정말 이상한데, 이건 번역자가 prophet를 '아마도 마감에 쫓기다' 실수로 pharaoh로 읽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일 것도 같다.


2. 망자를 위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주된 기능이기 때문에 장례사원 혹은 장제전이라 번역되고 영어로는 mortuary temple이라 하는 신전(혹은 사원)을 '그녀가 매장된 사원'이라 번역했다. 중왕국 시대 왕묘들 가운데는 신전과 매장지가 함께 만들어지는 사례들이 있지만 (예를 들어서 멘투호테프 2세의 장례신전 및 무덤), 신왕국 시대의 왕묘는 신전과 매장지가 완전히 분리된다. 해당 대목은 데이르 엘-바흐리의 하트셉수트 장례신전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이었던 만큼, 이 번역은 틀린 번역이다.


3. 투탕카멘 보다 연상이었던, 즉 누나였던 앙카센아멘을 여동생이라 해놓았다. 이것은 영어 sister를 번역자가 자의적으로 번역했기 때문일 것이다. 간단한 조사만 하더라도(예컨대 위키피디아 검색) 앙케센아멘이 투탕카멘 보다 먼저 태어난 '역사적 사실'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오누이 간에 연상-연하 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에는 '누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4. 'Harem girl', 즉 후궁을 '빈민가의 여인'이라 번역했다. 이건 영-한 사전에 나온 뜻을 그대로 적용한 직역일 가능성이 있다. 투트모스 3세가 정실 왕비가 아닌 후궁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5. 보통은 '점토판'이라 번역하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문헌 자료들을 '진흙 태블릿', '진흙 문서'라 번역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점토판'이라 번역하기도 했다. '번역자가 설마 점토판이 무엇인지 잘 모르나?'라고까지 의심하게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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