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고 어느 날, 거실에 에어컨 밑에서 물이 새어 나오고 있는 걸 애들이 먼저 발견했다.
덥고 습도가 쩔어서 에어컨을 끌 자신이 없던 나는 이 일을 알게 되면 난리가 날 남편에게 아무말 하지않고 휴지로 에어컨 주위를 감아놓고 아주 혼자 쌩쑈를 했다. 비가 오면 수시로 에어컨 옆에서 서성이며 휴지를 교체했다. 인터넷에 에어컨에서 물이 샌다고 검색질을 수없이 하며 한 달 전에 옥상 바닥을 새로 했는데 이노무 아저씨가 배관을 건드려서 어디가 찢어졌나 어쨌나 따져 물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와중 비가 그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에어컨에서 물새는 것이 멈추는 것이다.
그제는 다시금 곧 쏟아진다는 비가 갑자기 무서와서 문득 남편한테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랬더니 남편은 별말 없이 실리콘을 갖고 옥상에 올라가 여기저기 보더니 내가 몇 번이나 옥상에서 실외기랑 배관을 살펴봤을 때도 보지 못했던 작은 구녕 하나를 찾아서 실리콘으로 메꿨다.
그날 오후 대차게 쏟아지는 비에 좀 전까지 물이 새어 나오던 에어컨 근처를 서성이며 이리 만져보고 저리 만져보는데 어딜 만져도 물기가 없는 것이다.
마음속에 자리 잡았던 수많은 근심 중에 하나가 사라지고 있었다.
벅찬 얼굴로 남편에게 감사를 표하며 혼자 속 끓이지 말고 진즉 말할걸 그랬다 했더니 그저 씨익 웃어 보이는데 새삼 이 남자에게 나는 옴팡 의지하게 되어버렸구나 싶었다.
그럼 뭐 어떻겠어. 이렇게 된 이상 이 남자에게 살포시 기대어서 인생을 좀 편히 살아볼까 마음먹어도 되지 않으려나. 결혼 13년 차 억척스런 아줌마가 연두부처럼 연약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