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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영 Dec 22. 2021

새벽길을 걸었다

책으로 마음을 비추며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잊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어린 딸은 거실에서 놀고 있고 엄마 역을 맡은 배우 정유미가 베란다에 서 있는 장면이다. 노을을 마주하고 아득한 눈으로 서 있는 그녀를 보자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거기에 서 있는 사람이 나인 것 같았다. 스크린에서 잠시 고개를 돌렸다. 겁났다. 눈이 마주칠 거 같아서. 그럼 주체 없이 눈물이 쏟아질 거 같았다. 힘차게 돌아가는 세탁기 앞에 공허한 눈빛으로 앉아있는 그녀를 보고 또 한 번 울었다. 누군가가 렌즈에 담았다면 그녀가 바로 나였을 테니까.     

이런 내 마음을 알았다면 누군가는 ‘복에 겨웠다’라고 했을 거다. 영화 속 김지영처럼 나의 결혼생활도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서 아들, 딸 하나씩 낳았고 건강하고 예쁘게 자라고 있었다. 난 엄마의 역할에 충실했고 남편은 성실했다. 친정의 도움을 충분히 받기도 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은유 작가는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행복했으나 뭔가 좌우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것 같았다. 나의 행복과 가족의 행복은 시시때때로 충돌했다. 아이를 집에 두고 내가 강의를 듣거나 영화를 보는 게 못 할 짓 같았으니 '나답게' 살기 위한 선택에는 묘한 죄의식이 따랐다. 이 감정의 정체가 뭘까. 지치고 복받치는 마음을 집중 탐문했다. 글을 쓰면서 여자, 엄마, 노동자라는 집합명사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김지영이라는 고유명사로서의 삶을 지켜내고자 버둥거렸다.”     


한쪽의 보람과 기쁨으로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채울 시간이 필요했고 꿈을 찾아야 했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아이를 재우고 늦은 밤에 시간을 보내니 취침시간이 점점 늦어졌고 아침에 일어나지 못했다. 하루의 시작이 분주하고 난 늘 허둥지둥했다. 새벽 기상을 결심했다. 둘째가 엄마의 빈자리를 느끼면 반복적으로 깼지만 몇 번이나 재우고 책상 앞에 앉았다. 어떤 날은 아이를 안고 앉아야 했다. 올빼미형에게 새벽 기상은 변화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새벽 4~5시에 기상했다. 물 한 잔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깨웠다. 그러고 나서 감사 일기를 쓰고 명상, 시각화, 꿈 쓰기, 독서를 했다. 감사 일기는 부족한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내가 가진 것에서 좋은 점을 발견하게 했다.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는 것을 경험하며 풍요로운 마음을 얻었다. 명상은 호흡을 통해 숨을 느끼고 몸의 감각에 집중하게 했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음을 생생하게 느꼈다. 진실로 내 안에 머무는 시간이었다. 명상을 마치면 꿈꾸었다. 막연하지만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이 현실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머릿속에 그려보고 기록했다. 아지랑이 같았던 꿈이 조금씩 보이면 그림도 선명해졌다. 그렇게 내 안을 채우고 책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시간을 보냈다.     


새벽은 시간을 넘어 나만의 작은 세상이었다. 움직임과 소리로 분주했던 세상도, 소란스럽던 내 마음도 고요하게 했다. 풍요로운 에너지를 얻었고 그 에너지로 꿈을 향해 가고 있다. 동화<헨젤과 그레텔>에서 헨젤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조약돌을 떨어뜨려 놓았다. 어두운 밤, 달빛에 반사된 조약돌을 따라 집을 찾아왔듯이 나 또한 책으로 마음을 비추며 새벽길을 걸었다. 한발 한발 나아가다 보니 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길 위에는 내가 놓은 조약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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