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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솔아 Apr 20. 2020

나이를 받아들이는 사람

나이 듦을 무서워하는 감정 인정하기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이 든다는 게 좋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너네 나이가 얼마나 좋은 지 아니?’ 혹은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야!’

선생님이 교실 안에 앉아있는 우리들의 가능성을 확인시켜줄 때마다 나는 오히려 나이에 얽매여갔다. ‘어리기’ 때문에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 처음에야 나의 가능성에 가슴이 뛰었지만 자주 듣다 보니 그 표현의 이면에 더 관심이 쏠렸다. 그럼 더 이상 ‘어리지’ 않게 될 때는 어떻게 되는 걸까?


20대가 되고 나면 ‘나이’에 대한 집착을 부추기는 말을 더욱 자주 듣는다. 스무 살을 지나 한 살 한 살 먹어갈 때마다 나이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받침이 ㅅ이면 중반이래"
"(25살에 다가가기 시작할 때)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 케이크라던데~"
"(25살이 넘어가는 시점부터) 우리도 이제 꺾였네"
"(20대 후반)아.. 우리 이제 곧 서른이야"

나이를 먹는 매 순간마다 세밀하게 젊음의 무게를 재고, ‘너는 나이 들고 있어!’를 인지시키는 표현을 듣는다.

나는 이런 표현에 노출될수록 사람이 나이에 얽매이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나이를 먹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인만큼 ‘나이 듦을 걱정하고 생소해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사람의 감정이라는 뜻이다. 애초에 사회가 그렇게 느끼도록 흘러가고 있으니.


나이 듦을 걱정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이 감정을 드러내는 데 아직 엄격한 것 같다.

“내가 벌써 00 살인 게 믿기지 않아요”라고 말할 때마다 “아이고 어린 게 무슨 그런 말이야!” 혹은 “야 나는 00+α 살이야! 내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마” 혹은 “내가 그 나이로 돌아가면 더 열심히 살 텐데!”라는 말들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도대체 몇 살이 되어야 “내가 00살이라니!”라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을까? 분명한 건 이 말을 하는 상황에 발화자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동시에 존재한다면 발화자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꺼낼 수 없는 말이라는 거다.

나는 사람들이 ‘나이 듦을 걱정하는 말’에 대해 발화자의 ‘나이’보다 그 사람의 ‘감정’에 더 신경 써줬으면 좋겠다. 자기 나이를 생소하게 여기는 건 그 사람의 나이가 적고 많음과 상관없이 그 사람의 인지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니.


잘 살다가 문득 “내가 벌써 00살인가?”하고 내 나이가 믿기지 않는 이유는 내가 살아오면서 보고 느꼈던 ‘00살’에 대한 기대상이 막상 그 나이에 도달한 나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이에 대한 기대상의 생성과 비교도 온전히 각자의 시간축 안에서 이루어지는데 사람들은 비교의 생산물인 ‘감정 집중하지 않고 단지 시간의 하나  ‘00 관심을 둔다. 그리고 본인의 시간대인 ‘00에서의 감정 생산물이  중하다고 여긴다.

감정은 비교하여 더 중요하다/아니다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구나’ 하고 이해해줘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 “내가 벌써 00 살인 게 믿기지 않아요.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을 때 타박하거나 제 나이에 대한 감정을 앞세우기보단 공감이 먼저 필요한 일이다.


나는 나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내 나이에 불안해해도 ‘사람이면 당연한 일이지!’라고 받아들이고 싶다.
내게 마냥 어른스러워 보이는 사람도 나와 같이 자신의 나이에 생소해하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는 걸 인지하고, 나보다 훨씬 어린 사람이 “제가 벌써 00 살인 게 믿기지 않아요” 할 때 “맞아, 충분히 그럴 수 있어.” 하고 말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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