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위험한 거 같은데?’
출근하고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다가 문득 깨달았다. 꾸역꾸역 삼켰던 스트레스가 드디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허용 범위를 넘은 것 같다고.
행동은 빨랐다. 심리 상담 경험이 있는 친구들과 정신과를 다니는 친구들에게 정보를 물어보고 답이 오기 전까지 인터넷에 ‘OO역 심리상담’ 혹은 ‘OO역 정신과’를 검색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몇 번이나 물어봤다.
너, 정말 힘든 거 맞아? 이게 병원까지 갈 일이야?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은데 너만 혼자 힘들어하는 거 아냐? ...그럼 네가 이상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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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상담이나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얘기를 온/오프라인에서 심심치 않게 접했다. 나 또한 “아프면 치료해야지. 병원이나 심리 상담 받는 게 뭐가 나빠?”라고 생각해와서 내가 힘들다는 느낌이 왔을 때 바로 친구들에게 상담이나 정신과에 대한 정보를 물어볼 수 있었다.
다만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확신이 필요해서 ‘치료를 받겠다’고 결정하기까지 많이 고민했다.
나는 치료가 필요하다고 스스로 설득하기가 참 어려웠다. ‘어? 치료받아야겠는데?’라는 느낌이 들었음에도 ‘내가 정말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인가?’에 대해 쉽게 확신할 수 없었다.
감기는 흔히 약을 먹든 먹지 않든 낫는데 일주일 걸리는 병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 내가 힘들어하는 현상이 감기와 같은 증상이 아닌지 스스로 끊임없이 되물었다. 가만히 있으면 나아질 텐데 괜히 오버해서 치료를 받고자 하는 게 아니냐고.
요즘에는 명상이나 테라피, 원데이 클래스 등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다양하고도 ‘정상적’인 방법이 도처에 널려있어서, 인식적인 터부가 존재하는 정신과 치료나 비용 부담이 심한 심리 상담을 고려해야 할 정도로 내가 ‘엉망’인지도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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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내가 '치료를 받겠다'로 마음이 기운 건 내게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점점 소진됐다. 3년간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즐겁고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난생처음 만나는 환경과 정말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태껏 쌓아왔던 ‘내’가 여러 번 무너졌다.
무너진 나를 다시 다독이고 세우기 위해 자기계발서나 심리 서적을 읽기도 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때로는 사주나 타로를 보면서 타인에게 믿음을 구했고 쿨타임이 돌아오듯 게임의 세계로 도피했다가 현실로 복귀했다. 꼬박꼬박 휴양지에 놀러 가 재충전을 하고, 시크릿이나 확언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아침저녁으로 기도와도 같은 확언을 되뇌었다.
잠깐 처지는 시기를 지나면 영어 공부나 운동에 매진할 정도로 열심히 사는 시기가 돌아오니까, 지금의 힘듦 또한 언젠가는 괜찮아 지리라. 믿고 버텼다.
‘내가 벽에 부딪혔구나.’ 깨달은 건 내가 알고 실행해 오던 모든 방법에도 내 기분과 에너지가, 혹은 열정이 도통 회복되지 않아서였다. 무기력하게 버티고 버티다가 나는 인정했다. 내가 무너지고 회복됐다고 생각했던 3년간의 궤적이 결국 0으로 수렴하는 과정이었다고. 나는 소진되고 있었다.
최후의 보루라고 여겼던 ‘치료’ 카드를 꺼낸 건 그 때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보아도 안 되었으니 전문가를 만날 때구나.
한편으로 이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돈 들지 않는 방법으로는 더이상 약발도 받지 않으니 돈이라도 때려 부어야겠다.'
여러 번 힘들었음에도 이제껏 ‘치료’를 선택지에서 제외한 건 나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적나라한 이유는 역시나 돈이었다. 회기당 십만원을 받는 상담 치료, 약값이 저렴하다고 할 수 없는 정신과 치료 모두 실비 보험이 안 된다. 치료를 받기로 한 순간부터 예상외의 지출을 감당해야 했기에 지금까지는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해버렸었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 돈을 써야 하는 순간이 오니 힘들다고 처음 느꼈던 그 순간부터 예정된 수순이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땜질할 돈이 없어서 미뤄두다가 결국 임플란트까지 가버리는 충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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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치료 받기를 결심하는 과정에서 나는 내 안에 있던 '정신 영역의 치료'에 대한 거부감을 발견했다. "아프면 치료 받아야지" 라고 말해왔던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나는 내게 치료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치료를 고려할 만큼 힘든 사람’으로서 나를 한 없이 가엽게 여기고 싶다가도, 정말 치료가 필요한 ‘약한 사람’이 아니기를 원했다. 동시에 내가 정신과 치료에 관대할 수 있었던 건 내가 계속 타인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가식적인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도 들었고, 이제 알면 된거지 안그래도 힘든데 굳이 파고들어 스스로를 비난해야겠니? 라는 마음도 들었다. 이 상반된 입장에 나는 꽤나 괴로웠는데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보니 이 문제의 핵심은 두 입장의 어디가 옳고 그른지 판단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건강한 상태였다면 이러한 생각의 양면성을 괴로움 없이 넘겨버렸을 텐데 그렇지 못했으니 ‘정말 내가 건강하지 않았구나’ 깨닫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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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를 받겠다’고 결심한 이후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다. “과연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정신’은 배 아프면 내과, 코 막히면 이비인후과, 이가 아프면 치과처럼 증상과 치료 방법을 바로 연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 두 가지 치료법이 존재하는 이상 결국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데 낯설진 않아도 익숙하지 않은 정신 치료의 영역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나는 초반에 심리 상담보다 정신과 진료에 마음이 기울었는데 진료 비용과 약값이 아무리 비싸도 1회 10만 원 보다는 저렴할 것 같아서였다. 내가 괜찮아지기 위해서는 비용이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둘 다 미지의 세계라면 돈이 더 적게 드는 곳을 고려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던 내가 마지막으로 결국 심리 상담을 선택한 이유는 내 증상을 들은 지인의 의견을 따랐기 때문이다. 대부분 어떤 방법을 선택하든 내 자유지만 내 상황에서는 상담이 더 나을 것 같다고 첨언했다. 나는 경험을 존중하는 사람이기에 쉽게 마음을 바꿔 먹었다.
심리 상담을 받기로 하고 여러 센터를 알아보았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두 곳 중 어디로 갈지 참 고민이었다. 한 곳은 회기당 7만 원으로 집이랑 가까웠고 한 곳은 회기당 10만 원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야 하는 곳이었다. 심리 상담을 공부한 지인의 말로는 두 상담사의 경력은 비슷하다 했다.
전자가 어디로보나 이득인데 후자가 자꾸 내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이유는 단순했다. 지인이 실제 상담을 받은 적 있고 추천한 곳이었기 때문에. 자기는 무조건 지인 추천을 1순위로 둔다는 상담 공부를 한 지인의 말에 눈을 질끈 감고 후자로 선택했다. 선택하고 나니 내 마음은 계속 후자였는데 금액 때문에 전자와 헷갈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