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밀대의 결의
(을밀대의 결의)
어쩌면 오래달리기가 이 병들어가는 나약한 사회를 바꿀 최선의 해결책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허겁지겁 바쁘게 사는 것 같지만 몸을 움직이지 않고 건강 불안증에 빠져 의료비나 건강보충제, 비타민제에 들어가는 비용은 가히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몰고 갈 지경이다. 사람들이 모두 오래달리기와 손을 잡으면 더 활기차고 건강한 생활을 영위할 것이고 그러면 국가는 메말라가는 국민건강보험 기금이 남아돌기 시작하는 축복을 누릴 것이다.
만약 국가가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할 때마다 완주 메달과 함께 장려금 백만 원씩 지불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건강하고 가장 행복지수가 높으며 생산성이 향상되고 창의력이 높아지며 단숨에 일등 국가가 될 것을 확신한다. 게임기 앞에서 몸과 마음이 시들어가는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들도 오래달리기와 손을 잡는 순간 활력이 넘치는 일상과 신선한 미래를 보장받을 것이다.
육체의 기억이 알알이 근육에 새겨졌다. 달릴 때 자존감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상승한다. 사람이 사는 게 그렇듯이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신에 대한 만족감을 느낄 때,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할 때이다. 주위 사람이 나를 인정하는 것은 내가 돈이나 명예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나에게 남다른 정신이 존재하고 놀라운 기질이 있고,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꾸준히 노력하는 중에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일이 발생할 때가 아주 많다.
태양을 향해 달리는 발걸음마다 무겁고 힘겨운 역사가 뒤로 물러나고 희망찬 역사가 펼쳐지는 듯하다. 나의 발걸음은 거침없이 태항산맥을 넘어 허베이성(河北省)으로 들어선다. 황하(河)의 북쪽(北)에 있다고 해서 허베이성(河北省)이다. 베이징과 톈진을 품고 있는 허베이성은 중국의 찬란한 문화와 역사를 두루 만날 수 있는 지역이다.
성도인 스자좡(석가장, 石家莊)을 비롯하여 바오딩(보정, 保定), 청더(승덕, 承德) 등 유서 깊은 도시들이 있다. 중국의 대표적인 협곡중 하나인 태항산 대협곡과 만리장성의 동쪽 끝 요새인 산하이관도 허베이성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춘추전국시대에는 연나라, 조나라의 땅이었다.
삼국지의 원소의 본거지이며,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는 베이징을 수도로 삼았고 이때부터 정치,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 때문에 중국 안에서도 역사 유적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청더피서별장, 장성, 청동능과 청서능도 모두 이곳에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허베이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周) 왕실에 타협하지 않은 채 의리와 명분, 절개를 지키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의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허베이성(河北省), 약칭은 지(Ji, 冀)로 우리말로는 기라고 읽으며 기주에서 유래했다. 기주, 낯익은 이름이다. 그렇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나오는 가장 감동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그들의 나이 28세, 29세, 24세에 맺은 영원한 약속, 도원결의가 아닐까 한다.
사내아이들이라면 술 배울 나이에 친구들끼리 술 한 잔 마시며 이 도원의 결의를 흉내 내보지 않은 사람이 또 있을까? 내가 지나는 곳에서 얼마 멀리 않은 곳에 바오딩시가 있다. 이곳이 유비와 장비의 고향 탁현이고 이곳에서 ‘도원의 결의’를 맺는다. 허베이는 조자룡이 고향이기도 하다.
황건적의 난이 온 천하를 어지럽힐 때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허름한 주막에서 만나 무너져가는 황실의 부흥을 위하여 의기가 투합하여 천하의 대사를 논의했다. 그때 장비가 제의했다. “우리 집 뒤뜰에 복숭아밭(挑園)이 하나 있는데 마침 복사꽃이 만발했소. 내일 복숭아밭에 모여 하늘과 땅에 제사 드리고 우리 세 사람이 함께 형제의 의를 맺도록 합시다.” 유비와 관우는 장비의 제의에 흔쾌히 찬동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비록 성은 다르오나 이미 의를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과 힘을 합쳐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하고……. 동년 동월 동일 동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같은 날에 죽기를 원하오니 천지신명이시여 굽어 살펴주소서." 이 세 사람이 도원의 결의를 하는 모습은 기백과 결의에 찬 장면으로 삼국지의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명장면이다.
탁월한 흥행사이며 기획자인 나관중은 사람들에게 유비를 충의와 너그러움, 인자함, 그리고 사랑과 관용까지로 두루 겸비한 명군으로 각인시키며 그의 ‘블록버스터 삼국지연의’는 인류역사상 가장 장기적이며 폭넓은 흥행몰이에 성공했다. 삼국지를 나관중이 집대성한 것은 맞지만 나관중의 창작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송나라 때부터 이야기를 해주고 돈을 버는 직업적인 이야기꾼이 대거 등장한다.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는 손오공 이야기와 함께 위, 촉, 오 세 나라가 통일을 위해서 싸우는 이야기이다. 이야기꾼들이 이야기해서 더 많은 돈을 벌려면 재미있어야 한다. 이야기꾼들은 이야기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청중들의 바람과 흥행 요소를 가미한다.
삼국지가 재미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실제 역사에서는 조조가 삼국을 통일하지만 삼국지에서 영웅은 조조가 아니라 유비인 것은 유비에게는 청중들의 감성을 자극할 인간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금만 들여다보면 실제 유비와 나관중이 만들어낸 캐릭터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는 걸 발견하게 된다.
유비는 어쩌면 나보다 더 찌질하고 못난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저 우는 것,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 명문 가문을 내세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인간이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는 몇 수 위인 것을 인정하여야겠다. 그는 눈물 연기를 잘하는 당대 최고의 성격파배우였다. 그리하여 눈물로 사람들의 마음을 일순간에 사로잡았다.
사실 정치인들에게 최고의 덕목은 연기력인지도 모른다. 그의 눈물 연기가 빛을 발하는 곳에 삼국지연의 전반에 걸쳐 몇 군데 나오는데 그중에서 빌려줬던 형주를 되찾으러 온 노숙 앞에서 흘린 눈물이요, 한나라의 헌제를 위해 흘린 눈물이 그렇다. 친척이라서 슬펐지만 스스로 황제가 되고 싶었다. 그가 꺼내든 필살기이자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을 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병이 났지만 제갈량은 병의 처방이 무엇인지 금방 알았다. 유비에게 황제가 되어달라고 간청하였다.
정말 클라이맥스는 관우의 죽음 앞에서 보인 눈물이었다. 유비가 서천을 평정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관우는 형주를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었다. 유비는 눈물을 흘리며 분기탱천하여 당장 대군을 이끌고 아우의 죽음을 복수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누가 보아도 지금 상황에서 동오를 정벌하러 나서는 것은 시기에 맞지 않았다. 대신들이 만류할 것은 불을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한날한시에 죽자고 의형제를 맺은 관우가 죽었는데 가만히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유비는 통곡을 했고 울다 기절하기를 여러 번 했다. 그리고도 사흘간 곡기를 끊었다. 누가 보아도 쇼였지만 사람들은 유비가 사랑이 많고 의리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겨서 신뢰할 수 있으며 충성을 바칠만하다고 생각하며 감동을 먹었다.
그것이 정치이다. 유비는 찌질했지만 적어도 정치를 할 줄 알았다. 요즘 시민을 웃기고 울리며 감동을 주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그런 정치인이 더욱 절실한지도 모른다. 거기다 그는 누구나 부정할 수 없는 효자였다. 유비와 견줄만한 캐릭터가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이야말로 고난의 통일마라톤 대장정을 통해 인민들을 울고, 웃기고, 감명시키며 결국 천하 대업을 이루었다.
이보다 더 멋지고 낭만적이면서도 결의에 찬 도원결의를 이번 가을 남북정상회담에서 꿈꾼다. 남북 정상이 다시 손을 맞잡고 이름도 대박인 평양시 대박산 능선에 올라 우리 민족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단군릉에 참배하고,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는 을밀대로 가 우리 민족의 평화는 우리끼리 지키자는 결연한 ‘을밀대의 결의’를 맺고 자주적으로 우리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역사적이고 감동적인 명장면이 연출되기를 바란다.
술이부작(述而不作) - 공자님 말씀이다. 공자마저도 자신의 최고의 논문인 논어를 선인들의 몇 가지 사상을 서술하고 밝혔을 뿐 어떤 새로운 것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공자나 맹자나 노자 같은 대 사상가들이 내로라하는 사상집을 펴내고도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삼국지도 그렇게 여러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거치면서 문학적인 감수성까지 덧입으며 오늘날에 이르렀어. 서양의 서술가들이 펴낸 문헌을 모두 개인 창작물이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실 중국인들의 자랑인 사서오경을 어떤 이의 창작물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이다. 오랜 기간 축적된 중국의 학술적 집대성이라고 보아야 맞다. 영국인들이 자랑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도 영국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자신의 감수성을 더해서 서술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어떤 나라의 탁월한 작가나 학자는 개천에서 용 나듯이 어느 순간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와 오랜 시간 축적된 어떤 지식들이 바탕이 되어주는 것이다. 문화재도 마찬가지이다. 거기에는 한 민족의 삶과 영혼뿐 아니라 세계사적인 역사의 발전 과정이 소롯이 녹아있다. 어떤 예술이든 고립적인 것은 없다. 예술은 개인이 가진 주체적 표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인류가 지향하는 지고의 가치이다.
1949년 10월 1일 오후 3시 중국공산당은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는 개국대전 의식을 거행했다. 그 몇 시간 전 타이완의 장제스 관저에는 개국대전 공습 명령을 추인해달라는 국민당 공군사령관의 전화가 계속 이어졌다. 지금 출격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제시간에 목적지 도달이 불가능하다는 재촉 전화였다. “좀 기다려라!” 그는 선뜩 공격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금방 다시 전화가 와 명령을 재촉했다. 그는 몸을 벌떡 일으켜 단호하게 말했다. “임무를 취소하라!”
공산당에 쫓겨 타이완까지 왔지만 당시 국민당은 막강한 공군력과 해군을 갖고 있던 반면 공산당은 육군만 있었다. 최후의 순간 장제스의 마음을 잡은 것은 천안문과 자금성이었다. 그는 국가적인 문화재는 정권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오쩌둥도 장제스가 천안문을 절대 공습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했다. 장제스가 출격명령을 내렸다면 실패할 확률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중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