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명구 Jun 10. 2022

아시럽에서 발로 쓰는 명상록 126

절벽에 서서 새 희망을 바라보다

         (절벽에 서서 새 희망을 바라보다.)     

 나의 달리기가 기대한 것이 나비효과이다. 그러나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한 것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녀린 날갯짓에 수많은 가녀린 나비들이 동조하여 태풍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내가 평화의 나무를 한그루 심고, 수많은 사람이 함께 심으면 숲을 이룰 터이고 통일은 그 숲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날 것이다. 가녀린 날갯짓 한 번 하고, 나무 한 그루 심는 것은 사소한 일이다. 아주 사소한 일을 하면서 세상의 변화를 이루어내는 큰 꿈을 꾸는 것이다.     


 결국, 하늘이 내게 허락한 것은 1만5천km를 달려오는 불굴의 의지뿐이었나? 의지로도 어쩔 수 없는 것 그것 때문에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말이다. 나는 이곳 단둥에서 멈추고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입북허가가 나오면 돌아와 다시 뛰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발걸음을 멈추는 순간 나의 달리기는 과거형이 되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금방 잊히고 말 것이다. 이제 막 힘을 받던 나비들의 날갯짓도 동력을 잃을 것이다.

 나의 달리기는 끝날 때까지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곳에 머물러 있는 자체가 남북당국에 압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북한을 통과하지 않고는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음 주까지 방북 허가가 나오지 않으면 장기전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것도 각오하고 있다. 그 여정이 지금까지 달려온 여정보다 더 멀고 험할지라도! 북한 국경에서 떠돌이가 되어 떠돌아다닐 것이다. ‘통일 떠돌이’가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한반도가 자주적으로 평화통일이 되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떠돌이 신세인지도 모른다. 슬프게도 우리는 너무도 오래 떠돌이 신세였다. 우리가 있어야 할 제자리를 찾아 나서는 머나먼 순례길이 바로 평화의 길이고 통일의 길이다. 떠돌이 중의 대표 떠돌이로 만주벌판과 연해주를 잇는 항일운동 유적지를 탐방하면서 옛 선지자들의 얼을 되살리는 것도 축복의 시간이 될 수도 있겠다.    

 

 이곳 만주 땅은 우리의 저항 정신이 곳곳에 깃든 땅이다. 이곳에 20여 일 머물면서 나는 그 옛날 거의 독립군을 챙겨 주듯 교민들은 나를 따뜻하게 대접했다. 압록강 신교가 내려다보이는 이성림씨 집에서 머물 때는 이웃에 살고 계시는 이진숙 교수님이 불고기 등 때때로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다 주시고 단둥 철교 근처의 민박집으로 옮기고서는 이곳 20여 년 전 단둥으로 와서 식당을 9개나 경영하는 성공을 이룬 백종범 사장의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좋은 사람들도 소개해주어 만나기도 했다.


 나는 매일 아침 압록 강변을 달리면서 동방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만난다. 이곳 단둥에는 수많은 조선족과 2만여 명에 달하는 북한 사람들을 만난다. 대부분 그들은 북과의 교역을 통해서 생업을 이어가는데 경제제재로 힘들어한다.

 며칠 전 점심식사를 같이한 조선족 여자 분은 신의주에 전자제품 공장을 하는데 요즘 물건 반입이 잘 안 돼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단둥과 신의주를 잇는 압록강 철교는 요즘 다시 조금씩 부산해지고 있다고 한다. 아침 10시쯤이 제일 분주하다는데 이때 나가보면 북으로 들어가는 화물차가 줄지어 있다.  

   

 우리는 백두산을 가기 위하여 고속열차를 타고 1시간 반 걸리는 심양까지 가고 거기서 다시 12시간 달리는 일반 열차의 침대칸에 몸을 싣고 백하로 갔다. 일기가 안 좋아 옌볜자치구 장백현으로 갔다. 압록강 양안에는 장백-혜산, 림강-중강, 집안-만포, 관전-초산, 단동-신의주를 통하는 5개소의 중국과 북한의 국경세관이 있다. 장백에서 바로 눈앞에 북녘의 혜산시가 바라다 보인다.

 이곳에서 압록강은 그리 장엄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10월 중순이지만 이곳 날씨는 손이 시릴 정도로 쌀쌀하다. 중국 쪽 사람들은 이 물에 빨래하는 사람은 보이질 않지만 건너편에는 여인들이 삼삼오오 고무장갑을 끼고 빨래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주 오래전부터 남쪽에서는 모습을 볼 수 없는 빨랫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는 모습이 정겨우면서도 안쓰러워 보인다.


 나는 “안녕하세요!”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니 저쪽에서 빨래하던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방망이질을 계속한다. 나는 재차 “안녕하세요!”하고 소리 지르니 다른 여인이 수줍은 듯 살짝 손을 흔든다. 이곳은 맘만 먹으면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북과 가깝다. 얼음이 꽁꽁 어는 겨울에는 더욱 그럴 것 같다.     

 바로 뒷산에는 발해 때 지어진 5층 전탑이 있었다. 이곳에서 발해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세운 나라이다. 중국의 기록에도 대조영은 ‘고구려의 별종’으로 묘사되어있다. 지배층은 대씨와 고씨가 주류를 이루는 고구려인이며 피지배층은 말갈족이다. 말갈족이야말로 우리 역사에 자주 등장하는 조연이며 금나라 때는 여진족, 청나라 때는 만주족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민족이다.     


 다음날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또 천지에 오르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이 비는 천지에서는 눈으로 내릴 것이다. 우리는 방향을 룽징(용정)으로 돌렸다. 룽징 가는 고갯길에 폭설이 내려서 가다가 몇 번을 차에서 내려 차를 밀어야 했다.

 3.1 만세운동의 파장은 중국의 상해를 거쳐 간도 지방과 연해주, 미주 등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이어졌다. 만주의 북간도 지역은 해외에서 가장 치열한 독립운동이 펼쳐진 곳이다. 3월 13일, 3.1운동의 발생 2주 뒤 용정에서 3.13 만세시위에는 2만여 명이 참가하여 13명이 죽는다.


 이 시위는 우리 민족뿐 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항일정신을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된다. 이곳은 윤동주, 문익환, 나철 등의 혼이 서린 땅이다. 이진숙 교수의 소개로 이곳의 3.13 기념사업회 회장이자 전임 용정 문화원 원장이기도 한 이광평 원장을 만나 그의 안내로 명동촌의 윤동주 생가를 방문하였다.

 그는 잔잔하고 슬프면서 강건하며 부드러운 순백의 영혼으로 우리 민족의 감성을 자극하며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 되었다. 그의 시를 마주한 이 땅의 모든 소년과 소녀들은 시인이 되고자 한 번쯤은 꿈꾸었다. 그 시절 누구나 한 번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성찰하지 않은 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내 아시럽 마라톤의 원류도 무의식 중에 잠재해 있는 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성찰하는 인간애, 민족애가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부끄러움으로 나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게 했던 시인이 다니던 명동학교에 들어서다 중국 길림성 CCTV 촬영 팀을 만나 나의 아시럽 평화마라톤을 소개할 시간도 얻었다.

. 중국 정부에서도 이곳을 유적지로 정성스레 관리하는 모습이다. 인터뷰는 생각보다 길어졌고 그들은 다시 윤동주 생가에 가서 촬영을 더하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일송정까지 같이 가서 촬영을 더 하자고 했는데 이미 날이 어둑어둑해져서 서둘러 우리 일행만 발길을 돌려 비암산 일송정으로 갔다.


 늙어 늙어가던 푸른 솔은 이곳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모여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하여 일본군이 소나무를 향해 사격연습을 하여 말려 죽였다고 한다. 휘휘 늘어진 소나무가 마치 정자와 같다고 하여 일송정이라고 불리던 소나무는 간데없고 후세에 심은 젊은 소나무가 그곳을 찾는 이들을 어설프게 맞는다.


 드넓은 만주벌판을 굽이굽이 흐르는 해란강 너머에 동모산이 보인다. 그곳이 발해의 중심지라고 이광평 원장은 설명한다. 일송정 정자에 서서 나와 송인엽 교수, 이광평 원장. 이성림씨가 ‘선구자’와 김광석의 ‘광야에서’를 만주벌판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힘차게 불렀다.     

 다음날은 날씨가 쾌청하여 백두산으로 향했지만 장백폭포를 보고 그곳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천물이 흐르는 것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직 눈이 덜 치워졌다는 것이다. 지금은 활동을 안 하는 휴화산이지만 여전히 땅속에 용암이 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천지로 올라가는 길은 아직 쌓인 눈을 치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사흘째 백두산은 우리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백번을 올라야 두 번 정상을 볼까 말까라고 해서 백두산이라고 이름 지어졌다는 농담도 있다. 이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이번 일정 중에 과연 천지에 오를 수 있을까? 나흘째 되던 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개고 날씨는 온화하였다. 백두산은 북한의 양강도, 함경북도와 중국 동북지방의 길림성이 접하는 국경에 걸쳐 있는 산이다. 중국 측으로 걸쳐 있는 백두산 지역은 길림성 장백(長白)현에 속해 있다. 중국은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른다. 백두산은 한반도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장군봉이 2750m이다.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국의 척추와 같은 골격으로 우리 땅의 모든 산들은 여기서 뻗어 내렸다 하여 흔히 '민족의 영산'으로 표현된다. 천지는 전 세계 화산호 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호수이다.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장엄한 봉우리들의 수려한 자태도 일품이다.


 백두산 천지로 오르는 길은 동, 서, 남, 북으로 총 4개가 있다. 그중 3개(서파, 남파, 북파)가 중국 지역에 속해 있다. 그중 우리는 북파로 올랐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북측 지역에 속한 동파로 천지 인근의 장군봉까지 올랐었다. 천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찢어져 살아온 73년이 비쳐오는 슬픔이 복받쳐온다. 이제 슬픔은 다 쏟아버리고 새로운 희망을 채워야 할 때이다. 우리는 작대기로 눈 위에 ‘평화통일’이라 쓰고 그 앞에 소주병과 사과를 놓고 4배를 올리며 천지신령에게 제를 올렸다.

 주머니에서 카톡에서 신호음이 울려 꺼내 보니 카톡이 이곳에서도 떠진다. 바로 페이스북 생방송으로 눈 덮인 천지의 장엄한 모습을 찍어 전송하니 사진으로 보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흥분한 것같이 좋아한다. 백두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만주벌판이 우리를 감격에 넘치게 한다. 그 감격이 노래가 되어 나온다. 우리가 ‘You raise me up’과 ‘선구자’, ‘광야에서’를 연속으로 함께 부르니 주위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비디오 촬영도 하고 박수도 쳐준다. 그중에 한국 분들은 함께 따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천지에서 감동의 작은 열린음악회가 열렸다.     


 다시 단둥으로 내려와 아침 운동을 하면서 압록강 앞에 섰다. 며칠 여유롭게 백두산 천지와 윤동주 생가 등 항일유적지를 돌아보았지만 입북 허가가 아직 깜깜하다. 압록강이 내 앞에 수천 길 절벽처럼 막아서고 있다. 맥이 빠지니 동공이 풀리고 풀린 동공으로 저 멀리 바라보니 절벽의 이중성이 보인다. 절벽에서는 바로 눈 아래를 바라보면 현기증이 나도록 아찔하지만 시선을 멀리 던지면 시야가 확 트이는 것이 가슴마저 시원하다.

 시선을 멀리 던지니 가슴 벅차오르도록 시원한 미래가 펼쳐져 보이는 듯하다. 절벽이란 어떤 이에게는 세상의 끝이지만 독수리같이 결연한 이에게는 세상의 시작이 된다. 새끼 독수리는 어미에 의해서 절벽에서 던져진다. 떨어지면서 살기 위해서 버둥거리다 보면 어느덧 날개에 힘이 들어간다. 비로소 아기 독수리는 바람을 타고 기류를 자유자재로 타며 새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게 된다. 그 순간 아기 독수리에게 절벽은 세상 끝이 아니라 세상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압록강이라는 절벽이 내게 새 세상의 시작이 될 것 같은 멋진 예감이 든다. 나는 많은 시민이 내 등을 떠미는 것을 느낀다.     

 독수리 2     

벼랑에서 뛰어내리면 

독수리 등에 올라탈지 아니면 

내 겨드랑이에서 날개가 돋아날지 

모르는 일 


희망은 기류를 탄 독수리 

부딪치는 절망의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절망의 절벽에 둥지를 틀며  

창공을 향해 날아오른다. 

별은 언제나

어둠의 어깨를 잡고 일어나 빛난다.     

작가의 이전글 아시럽에서 발로 쓰는 명상록 12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