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쏘잼 Apr 22. 2021

근 6개월 만에 겨우 펜을 잡았다

안녕? 아날로그

편지지를 꺼냈다, 그런데 뭘 적어야 하지?


남편의 생일이었다. 케이크는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로 미리 주문해 놓고, 남편 생일 당일에 픽업 가겠노라 빵집에 전달해 둔 상태였다. 선물은 남편이 원하는 걸로 직접 고르게 해 줄 요량이었다. 남편과 나의 취향은 아주 극과 극이었던지라, 남편의 희망 사항인 '축구화'를 직접 고를 자신이 나에게는 없었다. 남편은 줄곧 내가 고르는 디자인의 물건들을 '1960년대 유행 같다'라고 놀려대기 일쑤였는데, 그럼 난 늘 거기에 클래식의 묘미를 모르는 곰 같으니라고, 하고 응수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연애기간 내내 남편은 매일같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 모든 기간 동안 심심치 않게 남편 손에선 예쁘게 쓰인 편지지가 선물처럼 나왔고, 그건 내가 연애 중 가장 좋아했던 순간이었다. 일상생활이 정돈 그 자체인 남편에게도 유일하게 흐트러진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글씨체였다. 삐뚤빼뚤하기 짝이 없었지만, 최대한 그 자리를 지켜 줄 맞춤한 여백 사이엔 늘 편지를 예쁘게 쓰고 싶어 노력한 남편의 흔적이 보였다. 남편이 건넨 편지는  하나하나 모여 내 다이어리의 빈 공간을 빼곡히 채웠고, 싸운 후 다이어리를 이따금씩 들여다보면 항상 화가 반쯤은 가라앉았다. 



선물과 케이크만 덥석 안겨주기 싫은 마음에 남편을 닮은 흑곰이 세 마리나 그려진 편지지를 꺼내본다. 무표정의 곰돌이 삼 형제가 아쉬워 펜으로 눈썹도 그려주고, 입꼬리도 올려주니 훨씬 더 남편과 비슷해졌다. 그런데 오랜만에 꺼내 든 편지지가 꽤 어색하다. 그동안 바쁨을 핑계 삼아 남편에게 편지를 건네주지 않았던 탓인가 보다. 겨우 다이어리 한 면보다 약간 더 큰 사이즈의 편지지를 채우기까지 꽤 오랜 고민을 해야 했다. '6개월 만에 신경 쓰려니까 너도 참 힘들지? 그니까 평소에 잘해'하고 누군가 소리 없는 질책을 하는 것만 같다.


남편 생일도 하와이는 이상 없이 맑음



디지털은 분명 삶의 질을 달라지게 했지만, 


지금은 엄연히 디지털, 그리고 디바이스 시대다. 나 역시 거의 하루 온종일을 디바이스에 둘러 쌓여 사는 사람 중 하나다. 장을 보기 위해 메모를 할 때도 포스트잇과 펜이 아니라 우선 핸드폰을 꺼내 든다. 학부 땐 공책에 필기를 하는 게 아니라, 랩탑이나 아이패드를 이용해 강의를 손쉽게 요약했다. 일을 할 때면 바로 옆사람에게 하는 간단한 대화마저 업무용 메신저를 통했다. 편하고, 빠르고, 조용한 데다 또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니까. 나라고 안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디바이스 활용은 어느새 습관이 되고, 이젠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의 가장 큰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친구와 하는 대화의 공감이 반 이상 'ㅇㅇ' 혹은 'ㅇㅈ'으로 마무리 지어지고, 필요한 마음은 이모티콘으로 표현하는 이 디지털 시대가 시간 절약에 탁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아쉽다. 어느 때 보다 보장된 효율성 속에 기대어 전보다 훨씬 빠르고 많은 양(quantity)의 메시지가 오고 가지만, 아날로그 시대보다 진심의 농도가 훨씬 옅어졌음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간에 살면서도, 정작 그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들은 모두 가장 축약된 대화를 부른다. 가끔은 너무 짧게 줄인 내 메시지 속 사소한 오해가 생기진 않을까 우려될 때도 있다. 그 우려는 곧 머리에 오래 머무를 새도 없이 '괜찮아, 요즘 트렌드에 따르려는 것뿐이야.'라는 간편한 합리화로 이어진다. 슬프지만 또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익숙해진 현실의 모습 중 하나다. 



젊은 세대들이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소셜에 공유하면서 유행처럼 번진 문구가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정도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대한 문장으로, '얼마 정도의 귀찮음을 이겨낼 수 있느냐가 곧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의 척도'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애정의 척도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통하면 통할수록 더 예쁘게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날렵한 애플 펜슬이 아닌 약간 통통한 진짜 펜을 어색하게 쥐어잡으며 편지 속 진심을 눌러 담아본다. 평소에 카카오톡으로 날리는 하트보다는 조금 더 진한 농도의 애정이 펜의 잉크 속에 녹아들기를 바라면서, 또 남편에게 부디 그 진심이 왜곡 없이 잘 전달되기를 소망하면서도.



디지털 시대는 분명 우리 삶의 질을 달라지게 했지만, 아직 아날로그의 자리까지 온전히 디지털이 대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마트의 'Electronics(전자 제품)' 섹션과 꽤 인접한 공간에 여전히 공책, 편지지와 펜들의 자리가 보란 듯이 놓여 있는 걸 보며 오늘도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일부러 쪽지처럼 어설프게 접어낸 편지지를 조심히 펼쳐내다, 잠깐 나와 마주친 눈을 초롱초롱 빛낼 남편이 유독 기다려지는 날이다. 남편, 생일 축하해


매거진의 이전글 결혼을 주저하지만 여전히 궁금해하는 당신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