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최근 몇 달 전부터 자꾸 내게 은근히, 그리고 꾸준히 어필해 온 소원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약간 덩치가 크고 순한 '강아지 키우기'였다.
아무래도 소원 모두가 생명에 바로 직결되는 부분이니만큼 쉽사리 '그래'를 말해서는 안 되는 문제들이었고, 그에 따라 나는 한결같이 "Hard No"를 외쳤다. 되돌아 생각해보니, 이런 나의 일방적 대답은 남편을 꽤 여러 번 속상하게 했던 것 같다. 그동안 스쳐 지나간 남편의 수많은 풀 죽은 표정들을 기억하다가 나의 이런 딱딱하기 그지없는 대답이 배우자로서 결코 적절하지는 않았음을 인정하게 됐다.
스스로에 대한 변론을 조금 보태자면, 나는 남편이 유부남일지언정 여전히 놀고먹는 자유가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20대는 여전히 진행 중이며, 게다가 미처 못해 본 세상 구경이 참 많이도 남았다. 나와 남편은 아직 프라하의 거리에서 사진을 남겨보지도 못했고, 아이슬란드의 오로라도 눈에 못 담았으며, 이태리에서 수제 가방(^^;)을 하나 사 보지도 못했지 않는가. 그런 남편을 데려다 당장 누군가를 먹여 살리라고, 또 돈도 많이 벌어오라고 벌써부터 닦달하고 싶지 않았다. 과한 책임의 무게를 올려주기에 남편이 아직 너무 젊었고, 그것을 핑계 삼아 나는 자꾸만 남편의 로망을 묵살해왔다.
동상이몽이란 예능 프로를 보면서 '남편이 하겠다는 건 다 해주는 아내가 되어야지'라는 결심을 했다. 남편이 젊어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아내라는 이름으로 박탈하지 않겠노라는 약속을 거의 매일 새겼다. 어렵게 한 결심인데 요즘 남편이 바라는 것들이 한없이 어른스러운 것들이라 많이 당황스럽고 난처하다. 또 거기에 늘어놓는 나의 대답들이 남편을 위한 선의를 갖췄음에도 여전히 네거티브이기 때문에 한층 고민스럽다. 그런 나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남편의 꼬리는 눈치 없이 가벼워 오늘도 나는 자꾸만 눈을 흘긴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로망은 사실 내가 어렴풋이 꿈꾸는 로망과도 아주 닮았다. 나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넓은 마당, 순하고 금빛이 도는 리트리버 한 마리, 까르르 웃으며 뛰어노는 아이가 함께하는 집을 꿈꾼다. 그러나 나는 결정하는 모든 순간에 고민을 하는 사람이고, 남편은 뚜렷한 목표를 세우면 박차를 가하는 사람이라 플랜을 실현하기까지의 서로의 속도 조율이 참 어렵다. 결국 이 모든 갈등은 우리를 네고(negotiation)의 테이블로 올려놓는데, 그 위에서의 신경전은 사회에서 타인과 맞는 신경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양보의 미덕을 챙기기보다 본인 어필에 열 올려 집중하는 순간도 많고, 왜 내 의견이 당신의 의견보다 정답인지를 묻고 따질 땐 불꽃이 튄다. 가끔은 남과 가족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허탈감이 몰려오기도 하고, 무엇을 위한 네고인가를 고민하다가 상황이 결국 원점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네고의 순간은 짧아도 그로 남은 상처는 꽤 오래가는 법이라 한 동안의 불편함은 다시 고스란히 부부의 몫이 된다.
결혼이라는 걸 조금 겪어보면서, 사실 그 협상 테이블에서 가장 필요했던 건 나의 논리나 지적 수준이 아니라 오히려 충분한 시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불같이 서로 의견을 내놓을 땐 하나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로의 공간에서 약간의 시간을 가지니 실루엣을 드러냈다.
남편의 퇴근 시간임을 알았지만 잠시 혼자 나가 이젠 관광객으로 꽤 붐비는 와이키키를 걸었다.
그리도 꿈꾸던 혼자만의 시간이었는데 이상하게 특별히 즐겁지도 않았다. 문득 나의 클래스 메이트였다가, 지금은 50대의 아이 엄마로 지내고 계신 이웃사촌님이 진심을 눌러 담은 목소리로 해 주신 말씀들을 떠올린다.
'제이미님, 그거 알아요? 내가 제이미님 남편 많이 봤잖아. 제이미님 남편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부족할지 몰라도, 이 아줌마 눈에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제이미님이 남편의 서포터가 되기로 약속해줬다면, 확실히 믿고 밀어줘요. 제이미님 남편은 정말 잘할 거야. 진짜야.'
연륜이 있는 어른의 눈에도 남편은 그런 사람인데, 남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는 내가 남편의 그림을 탐탁지 않아했던 것이 미안해진다. 진심은 그게 아니었지만, 물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도 진심이 직구로 닿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 그래서 결혼은 쉽지 않다는 말이 계속 나오는가 싶으면서도, 이 마저 내게 남겨진 미션이라 생각하며 크게는 부담을 가지지 않을 생각이다. 집에 돌아가는 길, 남편을 마주하면 '미안해. 이제 여보 계획 조금 더 성의껏 들어보고 같이 이야기할게.' 하며 먼저 말을 붙여보기로 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남편에게 전화하려 집어 든 핸드폰이 어느 날보다 가볍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남편에게 카톡이 왔다.
'어디야? 나도 너 기다리는데, 얘도 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