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아날로그
편지지를 꺼냈다, 그런데 뭘 적어야 하지?
남편의 생일이었다. 케이크는 남편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초코 케이크로 미리 주문해 놓고, 남편 생일 당일에 픽업 가겠노라 빵집에 전달해 둔 상태였다. 선물은 남편이 원하는 걸로 직접 고르게 해 줄 요량이었다. 남편과 나의 취향은 아주 극과 극이었던지라, 남편의 희망 사항인 '축구화'를 직접 고를 자신이 나에게는 없었다. 남편은 줄곧 내가 고르는 디자인의 물건들을 '1960년대 유행 같다'라고 놀려대기 일쑤였는데, 그럼 난 늘 거기에 클래식의 묘미를 모르는 곰 같으니라고, 하고 응수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연애기간 내내 남편은 매일같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 모든 기간 동안 심심치 않게 남편 손에선 예쁘게 쓰인 편지지가 선물처럼 나왔고, 그건 내가 연애 중 가장 좋아했던 순간이었다. 일상생활이 정돈 그 자체인 남편에게도 유일하게 흐트러진 것이 있다면 그건 바로 글씨체였다. 삐뚤빼뚤하기 짝이 없었지만, 최대한 그 자리를 지켜 줄 맞춤한 여백 사이엔 늘 편지를 예쁘게 쓰고 싶어 노력한 남편의 흔적이 보였다. 남편이 건넨 편지는 하나하나 모여 내 다이어리의 빈 공간을 빼곡히 채웠고, 싸운 후 다이어리를 이따금씩 들여다보면 항상 화가 반쯤은 가라앉았다.
선물과 케이크만 덥석 안겨주기 싫은 마음에 남편을 닮은 흑곰이 세 마리나 그려진 편지지를 꺼내본다. 무표정의 곰돌이 삼 형제가 아쉬워 펜으로 눈썹도 그려주고, 입꼬리도 올려주니 훨씬 더 남편과 비슷해졌다. 그런데 오랜만에 꺼내 든 편지지가 꽤 어색하다. 그동안 바쁨을 핑계 삼아 남편에게 편지를 건네주지 않았던 탓인가 보다. 겨우 다이어리 한 면보다 약간 더 큰 사이즈의 편지지를 채우기까지 꽤 오랜 고민을 해야 했다. '6개월 만에 신경 쓰려니까 너도 참 힘들지? 그니까 평소에 잘해'하고 누군가 소리 없는 질책을 하는 것만 같다.
디지털은 분명 삶의 질을 달라지게 했지만,
지금은 엄연히 디지털, 그리고 디바이스 시대다. 나 역시 거의 하루 온종일을 디바이스에 둘러 쌓여 사는 사람 중 하나다. 장을 보기 위해 메모를 할 때도 포스트잇과 펜이 아니라 우선 핸드폰을 꺼내 든다. 학부 땐 공책에 필기를 하는 게 아니라, 랩탑이나 아이패드를 이용해 강의를 손쉽게 요약했다. 일을 할 때면 바로 옆사람에게 하는 간단한 대화마저 업무용 메신저를 통했다. 편하고, 빠르고, 조용한 데다 또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니까. 나라고 안 할 이유가 있나,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디바이스 활용은 어느새 습관이 되고, 이젠 자연스럽게 우리 생활의 가장 큰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친구와 하는 대화의 공감이 반 이상 'ㅇㅇ' 혹은 'ㅇㅈ'으로 마무리 지어지고, 필요한 마음은 이모티콘으로 표현하는 이 디지털 시대가 시간 절약에 탁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끔 아쉽다. 어느 때 보다 보장된 효율성 속에 기대어 전보다 훨씬 빠르고 많은 양(quantity)의 메시지가 오고 가지만, 아날로그 시대보다 진심의 농도가 훨씬 옅어졌음을 부정하기가 어렵다.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필요로 하는 시간에 살면서도, 정작 그 팀워크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존재하는 수단들은 모두 가장 축약된 대화를 부른다. 가끔은 너무 짧게 줄인 내 메시지 속 사소한 오해가 생기진 않을까 우려될 때도 있다. 그 우려는 곧 머리에 오래 머무를 새도 없이 '괜찮아, 요즘 트렌드에 따르려는 것뿐이야.'라는 간편한 합리화로 이어진다. 슬프지만 또 굉장히 빠른 시간 내에 익숙해진 현실의 모습 중 하나다.
젊은 세대들이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소셜에 공유하면서 유행처럼 번진 문구가 있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정도를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대한 문장으로, '얼마 정도의 귀찮음을 이겨낼 수 있느냐가 곧 그 사람에 대한 애정의 척도'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애정의 척도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을 통하면 통할수록 더 예쁘게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날렵한 애플 펜슬이 아닌 약간 통통한 진짜 펜을 어색하게 쥐어잡으며 편지 속 진심을 눌러 담아본다. 평소에 카카오톡으로 날리는 하트보다는 조금 더 진한 농도의 애정이 펜의 잉크 속에 녹아들기를 바라면서, 또 남편에게 부디 그 진심이 왜곡 없이 잘 전달되기를 소망하면서도.
디지털 시대는 분명 우리 삶의 질을 달라지게 했지만, 아직 아날로그의 자리까지 온전히 디지털이 대신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마트의 'Electronics(전자 제품)' 섹션과 꽤 인접한 공간에 여전히 공책, 편지지와 펜들의 자리가 보란 듯이 놓여 있는 걸 보며 오늘도 안도의 숨을 내쉰다.
일부러 쪽지처럼 어설프게 접어낸 편지지를 조심히 펼쳐내다, 잠깐 나와 마주친 눈을 초롱초롱 빛낼 남편이 유독 기다려지는 날이다. 남편, 생일 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