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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쏘잼 Jan 26. 2023

미국 물 먹은 악독한 며느리의 반성문

찜찜함에 잠이 오지 않아서 남겨봅니다

하와이 시간 아침 10시. 한국 시간 새벽 5시. 

업무 중 울려대는 진동에 홀려 흘깃 폰을 봤더니 카톡 발신자에 '시어머님'이 두둥-하고 떠 계셨더랬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어떤 중요한 걸 잊었나? 어머님 생신일까? 아버님 생신? 그것도 아니면 시동생 생일?



"쏘잼아~ 명절인데 연락도 없고.... 혹시 너네 싸웠니?"

생신도 생신이지만, 그건 설날이었다. 한국을 뜬 지 10년 차에 접어들면 한국의 명절이나 기념일에 굉장히 무뎌지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결혼 3년 차. 남편은 한국인. 시부모님도, 우리 친정 부모님도 모두 한국에 거주하시지만 요상한 우리 부부는 미국 정서가 잘 맞아 우리끼리 이렇게 하와이에 덜렁 떨어져 산다. 남편보다는 내가 조금 더 일찍 건너와 오래 살았고 이후에 여기서 만난 잘생긴 남편이 마음에 들어 생각보다 내 예상보다는 조금 이르게, 27살에 결혼에 골인하게 됐다. 



약 2주 전쯤, 한국도 미국도 모두 다 같이 "Happy New Year!"을 외쳤을 때 시부모님께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는 연락을 드려 안심하고 방심했다. 나는 현재 금융권에 종사 중으로, 언제나 공격적으로 경쟁적인 이 업종 특성상 늘 긴장을 늦출 수 없어 직장에선 항상 예민하고 반쯤은 냉정한 상태에 있다. 1년이 채 안 된 신입이었지만 작년엔 승진도 했다. 10년을 이곳에 살았어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나고 자랐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파생되는 문제와 스스로를 향한 자책의 굴레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 나는 그렇게 늘 성과와 일의 퀄리티에 목을 매는, 뾰족뾰족한 고슴도치가 되는 길을 택했다. 



결국 고슴도치는 오늘 가시를 세우지 말아야 할 곳에 세웠다. 작년에 연락도 열심히 드리고, 해야 할 며느리의 도리도 다 챙겨한다고 했는데 시아버님께선 지난달 하와이에 방문하셔서 지나가는 말씀으로 '연락을 좀 더 자주 하라'고 하셨다. 남편도 이번 설에 우리 부모님께 따로 연락을 드리지 않았지만 나는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친정 부모님께 자식이 아니라 사위일 뿐이니까. 그리고 1월 1일에 연락드렸다는 사실을 내가 알았으므로. 내 기준에 이 남자의 노력은 그만하면 훌륭하도록 기특했기 때문이다. 



'어머님~ 정말 죄송해요....!!! 저랑 남편 둘 다 명절인지도 모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그렇게 바쁘게 지냈어요... 어머님 아버님께 연락드리는 게 아니면 보통 한국엔 연락할 일이 통 없으니 제가 자꾸 깜빡깜빡해서 죄송합니다. ㅠ.ㅠ.. 아마 남편도 깜빡해서 저희 부모님께 연락 안 드렸을 것 같은데 오늘 꼭 까먹지 말고 연락드리라고 말해줘야겠어요!! 어머님 아버님 잘 지내시죠?'



저 카톡을 날리고 나는 답장을 받지 못했다. 애초에 답장을 기대했다면 저런 식으로 카톡을 사악하게 돌려서 날리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에겐 사실 그대로 이야기했다. 나는 2주 전에 연락을 드렸고, 설날인지는 미처 챙길 겨를이 없었으며 너도 우리 부모님께 연락 안 드리지 않았냐. 그러니 우린 쌤쌤이다.(!) 남편은 나의 살기가 카톡으로 느껴졌는지 그 무엇보다 우선 나의 기분을 살폈다. 그리곤 나의 의견에 수긍하며 맞는 말이라고. 엄마에겐 본인이 잘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대충 정리가 된 줄 알았는데 사실 업무가 끝나고 집에 와 마저 다른 공부를 하려고 하니 단 1도 집중이 되지를 않는다. 아까부터 뭔가 잘못 먹은 사람처럼 얹힌 것 같고 뭔가 묘하게 기분이 찜찜하다. 조금 더 유하게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테지만 동시에 나는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 며느리'같은 며느리 딜레마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다. 어머님께 보낸 카톡은 그에 대한 의사 전달, 그 어디쯤이라고 '나의 세대'에는 부드럽게 여겨질 수 있는 것일까.



이건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며느리에게 연락을 받고 싶은 시어머님의 입장. 여기 사는 사람들과 비교해 경제적으로, 커리어적으로 뒤처지지 않고 싶어 앞만 보는 아내와 며느리의 입장. 그 중간에서 오늘내일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남편의 입장이 각자 있을 터이다. 오늘 집에 와 남편의 뒷모습을 보니 막상 조금 짠하기도 했다. 남편이 나에게 늘 넘치게 좋은 사람이라, 나도 항상 좋은 와이프가 되고 싶었는데. 오늘도 나도 모르게 내 이기심이 불쑥 앞서 남편을 중간에서 조금 힘들 게 한 것 같다. 



아직 새해의 시작이니까 늦지 않았다고. 조금 더 부드러운 사람이 되겠다던 새해의 다짐을 다시 한 번 붙들어 매 본다. 당장 내일은 아니더라도 약간 시간을 두고, 나의 고슴도치 가시는 이불로 꽁꽁 숨겨든 채 시부모님께 나의 입장과 생각을 명랑하게 말씀드려야겠다. 여느 며느리/사위가 다 그렇듯, 나는 또 카톡의 첫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겠지. 



한국의 모든 며느리/사위들 화이팅이다. 

어머님, 우리 올해는 조금 더 친해져 보도록 해요. 

천방지축 며느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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