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어쩔 수 없나보다
일본 미술사 수업 발표가 있었다. 중세 건축 양식에 치우쳤던 2학년 수업과는 다르게 일본 “미술”과 관련된 모든 주제는 오케이. 마지막 학년이라 그런지 석사를 한다면 어떠한 -연구된 적 없는-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할 것인가가 주된 포인트였다. 한국인 미술사 학도로서 일제강점기 한국 미술은 지난 삼년간 혼자 조심스레 갖고 있던 호기심이었고, 유감스럽게도 일본 미술 수업이니 역발상으로 이십 세기 전반의 일본 그림을 알아보기로 했다. 학교에서 신문, 연극, 노래 검열은 배웠어도 그림 검열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그림으로도 제국주의 사상을 전파했겠다 싶은 게 발상의 시작이었다.
실제로 1910년부터 (특히 문화 정책이 시작된 20년대 이후로) 미술 교육을 이유로 일본인 작가들이 경성 땅을 밟았고, 조선 미술 전람회 등으로 지금의 서울 땅은 동양화로 (혹은 서양화풍의 그림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광복 이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문 하에 수많은 그림이 불태워졌고, 현재로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는 그림조차 몇 점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인 화가들은 경성, 더 나아가 한반도에 머물며 금강산의 정취에 푹 빠지기도 했고 서민들의 삶을 고스란히 화폭에 옮기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가토 쇼린 처럼 대한제국의 풍광에 애착을 가졌던 화가도 있지만 곤 와지로, 요시다 하츠사부로 처럼 세밀한 표현력으로 조선총독부에 여러 부락의 실태를 그림으로 보고한 인물들도 분명 존재했다는 것이다. 색칠까지 더해진 그들의 그림은 흑백 사진으로나마 전해지는 당대의 한반도를 보충해주는 사료다. 내 개인적 시선으로는 제국주의 이념이 강하게 반영된 작품들이지만.
먼 훗날 나의 연구 주제가 될 수도 있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에 이곳에서 더 깊이 파고들지는 않겠지만, 교수님의 반응은 가히 긍정적이었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국 미술사 전문가는 가뭄도 아니다. 그냥 없다. 예외로 최근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CNRS) 소속의 M.Arnaud Nanta는 한국 이곳 저곳의 (논문을 살펴보니, 예를 들어 공주!) 유적 발굴을 통한 20세기 초반 일본의 제국주의 야심을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림을 통한 연구는 아직 제로라며 이 주제로 연구를 해보라는 조언을 들은 것이다.
심지어 마치 내가 늘 하던 생각처럼, 교수님 또한 한국은 아직 연구되지 않은 나라이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당장 시작해야 한다고 하시더라. 하지만 저는 이미 다음주에 미술 시장 석사 면접 헝데부(rendez-vous)까지 잡았는걸요? 사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이야기는 -한국인 학생으로서- 프랑스인들 앞에서 한번쯤 꼭 발표해보고픈 주제였고, 나는 내 소박한 꿈 중 하나를 이룬 것 뿐인데 이렇게 반응이 좋다니 새로운 꿈이 생긴 셈이다.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