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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준영 Nov 01. 2020

말라테스타와 몬테펠트로 그리고 단테

단테가 전하는 로마냐의 두 라이벌 가문 사람들 이야기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보면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8번째 지옥을 지나고 있을 때, 불타고 있는 영혼 하나가 쫓아와 그들에게 말을 건다[1]:

“이보시오, 방금 ‘너에게 더이상 물어 볼 것이 없으니 그만 가 보아라’라고 롬바르디아 말로 이야기한 당신, 괜찮다면 잠시 멈춰서 나와 이야기 합시다. 내 고향 로마냐의 우르비노Urbino[2]와 티베르 강 수원 산간 지역들이 지금은 평화로운지 아니면 아직도 전쟁 중인지 좀 알려주시겠소?”

베르길리우스가 부드럽게 단테의 등을 두드리며 그에게 말했다.

“여기 이 이탈리아 사람이 말해 줄 거요.”

단테는 주저없이 그에게 이야기했다.

“오 가련한 영혼이여, 당신 고향 로마냐는 한시도 전쟁에서 해방된 적이 없다오....라벤나Ravenna는 여전히 폴렌타Polenta의 독수리가 체르비아Cervia까지 날개 밑에 품고 있고[3]...

늙은 마스티프 사냥개와 그 아들은 아직도 같은 자리[리미니]를 입에 물고 있지요...그럼, 이제 로마냐의 소식을 묻는 당신이 누구인지 우리에게 그 이름을 말해 주시겠소?”

  이 이야기에서 단테가 언급한 ‘늙은 마스티프와 그 아들’이란 리미니Rimini의 지배자인 말라테스타 다 베루끼오Malatesta da Verucchio (1212-1312. 본명은 마스티노 Mastino이며 이는 사냥개의 일종인 마스티프의 이탈리아식 표기이기도 하다)와 그 아들 말라테스티노Malatestino Malatesta (?-1317)이고 그에게 로마냐의 소식을 묻는 영혼은 우르비노의 군주 귀도 다 몬테펠트로Guido I da Montefeltro (1223-1298)다. 로마냐의 교황당(Guelph) 리더였던 말라테스타 다 베루끼오는 아들 말라테스티노와 함께 리미니의 황제당(Ghibelline)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도시의 정권을 장악한다. 로마냐의 황제당 리더인 귀도 다 몬테펠트로는 그의 최대 적이었으며, 한 때 말라테스타의 군대를 물리치고 체제나Cesena를 점령하기도 했다(1275년). 두 사람의 적대관계는 그 자손들에게도 대물림 돼, 2백년 뒤 르네상스 역사에 길이 남을 두 라이벌 시지스몬도 판돌포 말라테스타Sigismondo Pandolfo Malatesta와 페데리코(혹은 페데리고) 다 몬테펠트로Federico (Federigo) III da Montefeltro까지 이어진다. 두 사람의 일대기와 치열한 다툼은 다른 편에서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단테가 이야기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범상치 않았던 이들의 선조와 친척들에 대해 좀 더 알아보겠다.

몬테펠트로(좌), 말라테스타(중) 가계도와 두 집안의 영토(우)

  말라테스타와 몬테펠트로 두 집안은 시지스몬도와 페데리코가 태어나기 전에도 이미 여러 특출난 인물들을 배출했다. 사실 단테가 <신곡>에서 언급한 이 두 가문 출신의 인물은 말라테스타 다 베루끼오와 말라테스티노, 귀도 다 몬테펠트로만이 아니다. 당대 이탈리아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치정사건의 주인공인 말라테스타 베루끼오의 다른 두 아들 잔치오토Gianciotto와 파올로Paolo도 <신곡>에 등장한다. 본명이 조반니Giovanni인 잔치오토는 선천적인 장애로 곱사등에 절름발이였지만 부친 못지 않게 유명한 콘도띠에로였으며 용맹하지만 잔인한 전사로 명성이 자자했다. 페사로의 포데스타podestà[4]였던 그는 라벤나를 지배하는 폴렌타 가문과 동맹을 맺고 이 집안의 딸 프란체스카Francesca da Polenta와 혼인하는데, <데카메론>의 저자 조반니 보카치오에 따르면 집안사람들에게 속은 프란체스카는 결혼 직전까지 잔치오토의 동생인 미남 파올로가 신랑인 것으로 알았다고 한다[5].

  자신을 속인 데 대한 보복이었는지 프란체스카는 결혼 후 파올로와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어느 날 리미니에 갔다가 예기치 않게 일찍 돌아온 잔치오토는 둘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다. <신곡>에서 단테는 정욕으로 죄를 범한 이들이 벌을 받는 두 번째 지옥을 여행하다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를 발견한다. 서로 몸이 뒤얽킨 채 돌풍처럼 몰아치는 저주받은 영혼들에 휘감켜 끝없이 빙빙 돌고 있던 두 사람은 단테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우리를 한 날 한 시에 죽음으로 이끌었지요. 하지만 카인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간 자 또한 [지옥에서] 기다리고 있답니다.”[6]

장 도미니크 앵그르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불륜을 발견한 잔치오토>, 구스타브 도레 <지옥에서 벌받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잔치오토와 파올로, 프란체스카의 이 세기의 스캔들은 단테 이후로도 수 많은 후대 문인, 예술가들의 작품 소재가 됐다. 보카치오는 단테의 <신곡>을 해제한 글에서 보다 극적인 요소들을 덧붙여 이 이야기를 소개했으며 19, 20세기에도 실비오 펠리코, 가브리엘레 단눈찌오 같은 작가들이 이를 소재로 한 희곡을 발표했다.[7]

음악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로씨니와 차이코프스키는 이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곡을 썼으며[8], 라흐마니노프와 리카르도 잔도나이[9]는 각각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미술 작품은 더욱 많다. 앵그르, 들라크루아, 도레, 카바넬, 로세티, 보치오니[10]등 화가들은 물론이고 로뎅, 카노바[11] 같은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도 프란체스카와 파올로, 잔치오토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남겼다.

  단테의 말대로 라면 잔치오토뿐 아니라 아마 그 아들도 죽어서 카인의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 잔치오토에게는 람베르토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람베르토 2세, Ramberto II. 프란체스카의 아들은 아님) 교활하고 속임수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사촌이자 파올로의 아들인 우베르토가 삼촌 판돌포 1세Pandolfo I[12]를 제거할 음모를 꾸미자 이에 가담하는 척 가장해 신임을 얻은 뒤, 공모자들의 비밀 회합에서 우베르토와 그 일당을 모두 죽인다. 하지만 역모 일당을 제거한 그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판돌포는 유언으로 리미니와 가문의 수장 자리를 큰 조카인 페란티노Ferrantino (말라테스티노의 아들)에게, 페사로를 자신의 아들 말라테스타 3세 Malatesta III ‘Guastafamiglia’ (말라테스타 과스타파밀리아)에게 물려주었을 뿐, 람베르토에게는 아무런 영지도 남기지 않았다. 불만을 품은 람베르토는 1326년 판돌포가 죽자 사촌들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그는 어느 날 저녁 리미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어 친척들을 모두 초대하는데, 말라테스타 과스타파밀리아와 페란티노의 폴렌타 가문 출신 며느리 폴렌테지아(또는 폴렌티사나라고도 불림)만 참석하지 않았다. 친척들을 모두 죽이려던 람베르토는 과스타파밀리아가 불참하자 계획을 바꿔 그의 가족들은 놔주고 페란티노와 그 가족들만 붙잡아 감금한다. 그리고는 과스타파밀리아에게 페란티노를 제거하고 리미니를 나눠 가지자고 제안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폴렌테지아는 재빨리 라벤나의 친정에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리미니의 시민들을 선동해 페란티노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다. 결국 과스타파밀리아가 제안을 거절하고 폴렌테지아를 돕기 위해 리미니로 진군하면서 람베르토의 음모는 실패로 끝났다. 정변 실패로 잠시 리미니에서 도망쳤던 람베르토는 몇 년 뒤 사촌들과 화해하지만 친척들 모두가 그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1330년, 페란티노의 아들이자 폴렌테지아의 남편 말라테스티노 노벨로는 겨울 사냥 나들이에 람베르토를 초대했다. 성에 도착한 람베르토가 가문의 수장이 될 인물인 그에게 예를 표하기 위해 무릎을 꿇자 노벨로는 눈깜박할 사이에 숨겨둔 단검으로 람베르토의 목을 찔러 죽였다.

  말라테스타 가문에 악명높은 인물들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과스타파밀리아의 아들인 판돌포 2세는 용병대장이면서 문학을 좋아해 시인 페트라르카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는 페트라르카의 시를 열심히 수집하는 것으로 성이 안 차 오래도록 이 시인을 만나고 싶어했다. 처음에는 고심 끝에 솜씨좋은 화가를 페트라르카에게 보내 그의 초상화를 그려오게 했으나 초상화를 보면 볼수록 자신의 우상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소망은 커지기만 했다. 마침내 1350년,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한 동안 전장에 나서지 못하게 된 판돌포는 밀라노로 찾아가 페트라르카를 만날 기회를 얻었다. 이 만남 이후 두 사람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친구가 됐고 페트라르카는 판돌포에게 헌정하는 시집을 만들어 그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판돌포가 죽은 뒤에도 그의 문화적 유산은 아들에게 이어졌다. 어릴 때부터 판돌포 2세가 수집한 시와 책들을 자주 접한 덕분인지 그의 아들 말라테스타 5세는 아버지보다 더 한 열성적 문학광으로 자랐고 훗날 ‘소네트의 말라테스타 Malatesta dei Sonetti(말라테스타 데이 소네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말라테스타 집안의 딸들도 아들들만큼이나 예사롭지 않았다. 가장 유명했던 것은 또다른 비극적 스캔들의 주인공 파리지나Parisina다. 본명이 라우라Laura인 파리지나 말라테스타(1404-1425)는 카시나 전투에서 존 호크우드를 패배시킨 갈레오토 (갈레오토1세, Galeotto I Malatesta. 과스타파밀리아의 동생)가 그녀의 할아버지이고 시지스몬도와는 사촌지간이다. 파리지나는 열 네살 때 스물 한 살 연상의 페라라 후작 니콜로 데스테 Niccolò III d’Este에게 시집갔지만 몇 년 뒤 자신보다 불과 한 살 어린 의붓아들 (니콜로의 서자) 우고Ugo와 사랑에 빠진다. 불행하게도 두 사람의 관계는 파리지나의 시녀가 밀고하는 바람에 발각됐고 분노한 니콜로는 우고와 파리지나를 참수형에 처했다.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이야기처럼 비극으로 끝난 이 치정사건도 많은 문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데 낭만주의 시대 영국 시인 바이런의 시 Parisina (1816)와 도니제티, 마스카니가 작곡한 같은 제목의 오페라들(각각 1833년, 1912년 발표)이 대표적인 예다. 파리지나와 니콜로 데스테 사이에 태어난 딸 지네브라Ginevra는 훗날 시지스몬도 말라테스타와 결혼하므로 파리지나는 시지스몬도에게 사촌 누나이자 (사후이긴 하지만) 장모이기도 하다.

  시지스몬도의 고모 젠틸레도 파리지나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다. 파엔짜Faenza의 영주 잔갈레아초 만프레디Giangaleazzo Manfredi와 결혼한 그녀는 1417년 남편이 사망하자 아직 어린 아들들을 대신해 섭정 자격으로 만프레디 가문의 영지를 다스렸다. 젠틸레는 내치에도 훌륭했지만 직접 전장에 나서서 남자들 못지 않은 대담함과 용기를 보여 준 여걸로도 유명하다. 그녀는 피렌체-밀라노 전쟁이 벌어지자 두 오빠들(카를로1세, 판돌포 3세)이 피렌체 군을 지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엔짜의 정치적 손익을 계산해 주저없이 밀라노 편에 섰으며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 접경의 모딜리아나Modigliana를 공격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이런 그녀를 일컬어 말라테스타 집안의 ‘판타질레아’[13]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말라테스타만큼 많진 않지만 몬테펠트로 가문에도 극적인 인생을 산 이들이 있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귀도 다 몬테펠트로의 큰아들 본콘테 Bonconte (또는 Buonconte) 2세다. 부친처럼 용병대장이었던 그는 아레초Arezzo의 황제당원들 편에 서서 교황당원들을 쫓아내고 이 도시의 군 사령관(Capitano del Popolo)이 됐다. 이후 시에나 군의 침입을 크게 무찔러 명성을 떨쳤으나 그 이듬해 아레초 군을 이끌고 캄팔디노 Campaldino전투에[14] 나섰다가 전사했다. 본콘테도 죽은 뒤 단테에 의해 불후의 명성을 얻었는데 지옥에서 고통받는 것으로 그려진 아버지 귀도와는 달리 신곡의 <연옥>편에 등장한다.[15]

  단테에 따르면 본콘테는 전투 중 목을 칼에 찔렸고 강가에 쓰러져 숨이 끊어지기 직전, 속죄의 기도 대신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입으로만 애타게 성모 마리아를 되뇌였다. 이를 본 하느님과 성모 마리아가 가엽게 여겨 그의 영혼을 천국으로 부르고자 천사를 내려 보냈는데, 그를 지옥으로 데려가려고 먼저 와 있던 악마가 이에 반발해 물러나길 거부한다. 결국 천사와 악마의 언쟁이 길어지면서 본콘테의 영혼은 연옥에 머물게 됐고 지옥으로 영혼을 끌어가지 못해 화가 난 악마가 폭우를 일으켜 그의 시신을 강물에 떠내려 가게 했다는 이야기다.

구스타브 도레 <본콘테의 죽음>(좌), 지롤라모 도메니끼니 <사형 판결 받는 우고와 파리지나>(우)

  똑같은 황제당원이었고 생전의 행적이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테는 왜 귀도는 지옥에, 그 아들은 연옥에 등장시켰을까? 귀도가 지옥에 떨어진 것은 그가 황제당 일원이었다는 사실 자체 때문이 아니다. 시대를 앞선 열린 사고와 비판적 지성의 소유자였던 단테는 단순히 특정한 정파에 속한다는 사실만으로 누군가를 단죄하진 않았다[16]. 실제로 <신곡>에는 악명높은 황제당원, 이단자들뿐 아니라 부도덕한 행실로 널리 알려졌던 여러 교황과 고위 성직자, 교황당원들도 지옥에 떨어진 것으로 묘사돼 있다. 귀도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는 그가 교황에게 비열한 술책을 쓰도록 조언했기 때문이다. 정적 콜론나 가문과의 분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귀도에게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성에서 농성 중인 적들을 제거할 묘안을 묻는다. 말년에 교회와 화해하고 은퇴해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들어가 있던 귀도는 교황의 자문에 ‘항복하면 사면하겠다고 약속한 뒤 적들이 성문을 열고 나오면 체포하라’는 술책을 제시한다. 귀도가 다양한 종류의 사기와 협잡, 속임수로 죄를 범한 이들이 벌받는 8번째 지옥에 떨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반면 본콘테는 불운한 죽음으로 인해 널리 세간의 동정을 얻었던 모양이다. 총지휘관이었지만 전사했을 뿐 아니라 전투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최후를 보지 못했고 시신도 끝내 찾지 못했다. 때문에 그의 죽음과 시신의 행방을 두고 무성한 (대부분 연민과 낭만적 상상에 기반한) 추측과 소문들이 생겨났으며 <신곡>에 묘사된 그의 최후는 단테가 제시하는 이에 대한 가설이기도 하다. 역사가들에 따르면 단테는 피렌체 군의 일원으로 캄팔디노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 어쩌면 단테는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는 본콘테의 모습을 직접 목격했는지도, 그래서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지옥행만은 피하게 해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콘테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과 함께 단테가 그와 반대편에서 같은 전투에 참전했었다는 사실은 일부 후대 사람들에게 흥미롭지만 근거는 희박한 억측을 불러 일으켰으니, 작가 조반니 파피니Giovanni Papini나 언어학자이자 단테 연구자 니콜라 징가렐리Nicola Zingarelli 같은 이들은 본콘테를 죽인 사람이 바로 단테가 아니었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주석
[1]이어지는 대화는 단테 <신곡> 지옥편 제 27곡 19-57절(Canto XXVII: 19-57)의 내용을 일부 원문의 구절을 살려 짧게 각색한 것이다.


[2]우르비노는 오늘날 이탈리아의 행정구역상으로 마르케 주에 속해 있으나 역사적으로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는 로마냐 남부로 간주됐다.


[3]폴렌타 (또는 다 폴렌타)는 13세기 말에서 15세기 전반기까지 라벤나와 주변지역을 지배했던 귀족 집안으로 황금색 바탕에 붉은 독수리가 그려진 문장을 가문의 상징으로 삼았다.


[4]중세 말,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최고 행정관을 이르는 명칭.


[5]보카치오의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파올로는 당시 유부남이었는데 소문이 자자할 정도의 이 미남이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프란체스카가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다.


[6] “Amor condusse noi ad una morte; Caina attende chi a vita ci spense”. <신곡> 지옥편 제 5곡 106-7절. 카인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하느님이 형인 아벨만 사랑하자 이를 질투해 아벨을 죽인다. 단테는 <신곡>에서 가장 깊은 지점에 있는 9번째 지옥 중일부인 이 장소가 혈육이나 친구를 배반한 자, 근친 살해자들이 벌 받는 곳이기 때문에 카인의 이름을 따 불리게 된 것으로 설정했다. 카인(의 지옥)이 잔치오토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 까닭은 <신곡> 속 이야기의 배경이 1300년 어느 날 밤이고 잔치오토는 이 때까지 아직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7]실비오 펠리코 <Francesca da Rimini>, 가브리엘레 단눈찌오 <Francesca da Rimini>.


[8]로씨니, 아리아 ‘Farò come colui che piange e dice’ (또는 ‘Francesca da Rimini’), 차이코프스키, Francesca da Rimini, Symphonic fantasy after Dante, Op. 32


[9]Riccardo Zandonai(1883-1944): 이탈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제자로 페사로의 로씨니 음악학교 학장을 역임했으며 병상의 푸치니가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의 미완성 된 부분 작곡을 끝내줄 인물로 그를 지목하려 했었다(푸치니 사후 아들의 반대로 다른 작곡가가 지명됨).


[10]Umberto Boccioni(1882-1916): 미래파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조각가. 이탈리아군에 소집돼 1차 대전에 참전했으나 훈련 중 사고로 사망했다.


[11]Antonio Canova(1757-1822): 신고전주의 미술의 최고 거장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탈리아 조각가.젊은 시절부터 높은 명성을 누리며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은 물론이고 미국, 러시아에서도 작품을 의뢰받아 수 많은 조각을 남겼다. 대리석 조각에 특히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2]말라테스타 다 베루끼오의 막내아들, 말라테스티노와 잔치오토의 동생. 아버지로부터 파노의 영주 자리를 물려받았고 형들이 차례로 죽은 뒤 리미니 군주이자 가문의 수장이 됐다. 부친과 형제들처럼 콘도띠에리로 일했으며 교황군 사령관에 임명되기도 했다(1321).


[13]판타질레아(또는 펜테실레아)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마존 부족(여자들만으로 이뤄진 전사 부족) 여왕으로 열 두 명의 여전사를 이끌고 트로이 전쟁에 참전했으나 아킬레우스에게 목숨을 잃는다.


[14]1289년 6월 토스카나의 캄팔디노 평원에서 벌어진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당과 황제당 간 전투. 피렌체군을 주축으로 한 시에나, 루카, 피스토이아, 프라토의 교황당 병력(기병 1600, 보병 1만)과 아레초를 중심으로 구성된 마르케, 우르비노의 황제당 병력(기병 800, 보병 8천-1만)이 맞붙은 이 싸움에서 피렌체-교황당 측이 큰 승리를 거뒀으나 아레초를 점령하는데는 실패하고 철군했다. 중세 말 중북부 이탈리아의 교황당과 황제당 간에 벌어진 무력분쟁 가운데 사실상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전투로 평가된다.


[15]연옥편 제5곡 (Canto V).


[16]피렌체는 일찍부터 교황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단테의 젊은 시절 교황당이 다시 강경파인 흑당(교황에 대한 절대 복종, 교황청의 피렌체 직접 지배 지지)과 온건파 백당(교황의 직접적인 피렌체 내정 간섭에 반대)으로 나뉜다. 단테는 백당의 중요 인사로 정부의 최고위직까지 올랐으나, 흑당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자 반정부 인사로 지목돼 피렌체에서 추방당했다. 적의 적은 곧 내 편이라는 말이 있듯이 망명 생활 중 단테는 대부분의 추방당한 백당 인사들처럼 타국이나 망명지의 여러 황제당 인물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 이 때문에 단테가 황제당원이었다고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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