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아시시나 페루자로 가는 기차를 타면 움브리아의 작은 도시 스펠로Spello라는 곳을 어김없이 지나간다. 이탈리아의 몇몇 언론과 문화, 관광 진흥 기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소도시'로 여러 차례 선정되기도 한 이곳은 매년 봄 구시가 전체를 화려한 꽃으로 장식하는 축제(Infiorate)로 유명하지만 사실 알고보면 움브리아의 도시들 대부분이 그렇듯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품은 고장이기도 하다. 오래 전 페루자에서 공부하던 시절, 이 도시의 역사는 물론이고 꽃축제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기차를 타고 스펠로역을 지나갈 때마다 이곳이 몹시 궁금했었다. 기차역 뒤편, 얕으막한 구릉 위로 보이는 스펠로의 구시가는 선로 위에서 보면 정말 한편의 동화 속 마을 같이 예쁘기 때문이다.
기차역에서 바라 본 스펠로 구시가
르네상스 시대 스펠로와 주변 지역을 지배한 것은 발리오니Baglioni 가문이었는데 1500년 이 집안에서 벌어진 골육상쟁의 사건 하나가 미술사에 길이 남은 걸작 회화 두 점을 탄생시킨다: 핀투리끼오Pinturicchio의 발리오니 예배당 연작 프레스코와 라파엘로의 <십자가에서 내림 Deposizione Borghese>.
발리오니 가문과 '피의 결혼식Le nozze di sangue'
대대로 많은 콘도띠에리를 배출한 움브리아의 발리오니는 원래 남부 독일의 귀족 집안으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1세의 신임을 얻어 한때 중부 이탈리아 일부 지역에서 황제를 대리하는 권한을 행사했다. 그 후 12세기 말-13세기 움브리아 지방의 토착 귀족으로 자리잡으며 델리 오디 degli Oddi등 페루자 주변의 다른 귀족 집안들과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인다. 이 시대 움브리아의 귀족 가문들이 대개 그랬듯이 발리오니 집안의 남자들도 타 지역 대영주, 도시들에게 고용된 용병대장으로 일하거나 성직에 종사하면서 지역 내의 권력다툼에 열을 올렸다. 1416년 말라테스타 1세 Malatesta I 가 이끄는 발리오니 가문은 브라치오 다 몬토네Braccio da Montone와 손잡고 페루자의 권력자 비오르도 미켈로티Biordo Michelotti 일파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몬토네는 움브리아의 주도권을 장악하며 페루자의 지배자가 됐고 발리오니 가문은 스펠로와 주변 지역(Spello, Bettona, Cannara)을 차지했다. 말라테스타는 몬토네의 누이와 결혼해 아들 다섯을 두었다(가계도 참고). 1437년 큰 아들 브라치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권력을 물려 받았는데, 브라치오는 이듬해 교황군 사령관이라는 지위를 앞세워 외삼촌 몬토네의 전사(1424) 이후 생긴 움브리아 중부의 혼란을 잠재운다는 구실로 페루자를 장악했다.
발리오니 가계도
이후 40년간 중부와 남부 움브리아의 지배자로 번영을 구가하던 발리오니 가문은 브라치오가 죽자(1479) 내분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그리포네)은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브라치오의 동생들인 귀도와 로돌포, 귀도의 장성한 아들 아스토레가 뒤를 이어 권력을 물려받았는데 문제는 브라치오의 유일한 손자이자 그리포네의 아들 그리포네토(페데리코)가 성인이 되면서 불거졌다. 친척들이 장손인 자신에게 권력을 넘겨줄 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자 분노한 그리포네토는 사촌 카를로(카를로 일 바르칠리아Barciglia. 말라테스타의 차남 카를로의 손자)와 음모를 꾸민다. 1500년 7월 14일, 페루자에서 아스토레의 결혼식이 열렸고 발리오니 가문의 일가 친척 대부분이 여기에 참석했다. 그 날 밤, 피로연에서 거하게 먹고 마신 하객들이 곯아 떨어진 틈을 타 무장한 부하들을 이끌고 들이닥친 그리포네토와 카를로는 귀도와 아스토레를 포함해 많은 친척들을 순식간에 살해하고 페루자의 정청에 들어가 정권 장악을 선언한다. 귀도의 동생이자 또 다른 권력자 로돌포는 칼에 찔려 중상을 입은 채 현장에서 도망쳐 나오긴 했으나 결국 회복되지 못하고 얼마 뒤 사망했다.
성공한 듯 보였던 그리포네토의 집권은 그러나 불과 24시간도 안 돼 허무하게 끝났다. '피의 결혼식'이 벌어진 바로 다음 날, 구사일생으로 현장을 빠져 나와 도시 밖으로 피신한 로돌포의 아들 잠파올로(혹은 잔파올로)와 귀도의 아들 아드리아노, 젠틸레는 잠파올로의 형제이자 스펠로의 주교 트로일로의 지원으로 군사를 모아 반격에 나섰다. 애초부터 쿠데타 이후의 계획을 철저히 세우지 않았던 음모자들은 생각보다 빠른 반격에 방어도 제대로 못해 보고 맥없이 진압됐다. 쿠데타 직후부터 아들의 신변을 걱정하던 그리포네토의 모친 아탈란타는 소식을 듣고 정청이 있는 광장으로 달려갔지만 아들은 이미 젠틸레와 그 부하들의 칼에 찔려 쓰러진 뒤였다. 그렇게 23살의 그리포네토는 자신과 이 사건에 연루된 양측의 친척 모두가 저지른 죄에 용서를 구하면서 오열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뒀다.
발리오니 가문 사람들: 왼쪽부터 잠파올로. 말라테스타 1세, 트로일로
핀투리끼오의 발리오니 예배당 프레스코
승리한 잠파올로와 아드리아노, 젠틸레는 권력을 나눠갖고 페루자를 공동으로 통치했다(아드리아노는 불과 2년 뒤 사망한다). 이들을 도와 진압 성공에 크게 기여한 스펠로의 주교 트로일로는 승리를 자축하고 신의 가호에 감사하고자 스펠로 시내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교회에 예배당을 지어 바치기로 한다. 이예배당의 벽과 천장 장식을 위해 움브리아 출신 대가핀투리끼오가 초빙돼프레스코화 제작을 맡았다. 그렇게 핀투리끼오와 그의 공방 제자들은 불과 1년만에 아름다운 천장화와 3면의 벽화를 완성한다(1501). 조수와 도제 등 공방의 인력, 자원을 조직적으로 활용해 효율적인 작업을 하기로 유명한 핀투리끼오였기에 가능한 속도였다. 3면의 벽화는 각각 <수태고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목동들>, <신학자들과 논쟁하는 어린 예수>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모두 화사하고 풍부한 색감과 원근법을 잘 구현한 화면 배치, 다채로운 인물군상 묘사로높이 평가받는 걸작이다.
핀투리끼오의 발리오니 예배당 프레스코 3연작: 좌측부터 <신학자들과 논쟁하는 어린 예수>, <수태고지>,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목동들>
그러나 이 3연작 프레스코는 단순히 예배당을 꾸미는 것만을 목적으로 제작된 게 아니다. 트로일로 주교는 핀투리끼오에게 '발리오니 가문의 권력에 도전하거나 배신하는 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는 정치적 메세지도 그림에 담도록 주문했던 것이다.주교가 요구한 메세지를 담기 위해 핀투리끼오는 그림의 배경 공간을 활용했다. 세 이야기 모두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이 아닌 화가가 살고 있던 당시의 움브리아 풍광과 생활상을 배경으로 해 묘사했으며, (예수, 마리아 이야기와 동떨어져 뜬금없지만) 멀리 화면 뒤편에 반란을 일으키는 군대와 실패한 반란자들의 최후를 암시한 장면 등을 집어넣었다.
발리오니 예배당 3연작 프레스코의 반란을 묘사한 원경 세부
라파엘로 <십자가에서 내림>
발리오니 예배당의 벽화는 승자의 의뢰로 제작된 반면, 라파엘로의 유화 <십자가에서 내림>은 패자의 비통함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피의 결혼식 사건으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아탈란타 발리오니는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해 페루자의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 교회 가족 예배당에 걸 제단화를 주문하기로 한다. 페루자 출신 대가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의 제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던 젊은 화가 라파엘로를 선택한 아탈란타는 특별히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대변하는 주제, Deposizione/Deposition(죽은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장면을 이르는 거의 고유명사화 된 용어다)를 그려 달라고 의뢰했다.
주문을 받은 라파엘로는 비슷한 주제의 선배 화가들의 작품을 두루 연구하며 다양한 작품 구도를 구상했다. 그 과정에서 라파엘로가 생산한 스케치들이 여럿 남아있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프랑스, 영국 등에 흩어져 있다. 아무튼 2년에 걸친 연구와 작업 끝에 1507년 완성된 이 그림은 라파엘로의 명성을 더욱 높여 주었다.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플랑드르 화가들을 통해 전해진 유화 기법이 아직 완전히 자리잡지 않았는데, 젊은 화가 라파엘로는 이 작품에서 풍부한 색감과 인물들의 감정, 신체 질감을 잘 구현해 이 새로운 회화에도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결국 <십자가에서 내림>의 성공 덕분에 우르비노 출신인 라파엘로는 로마로 진출하게 된다.
라파엘로 <십자가에서 내림>
작품 제목은 <십자가에서 내림>이지만 이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광경은 정확히 말하면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 무덤에 안치(이 장면은 종교화에서 고유명사처럼 Entombment라 부른다)하러 가는 도중의 장면이다. 특이한 것은 작품의 제작을 의뢰한 것은 아탈란타였지만 그림 속에서 그녀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는 인물 성모 마리아(화면 오른쪽에 실신한 여성)가 보는 이의 시선에서 비껴나 있다는 점이다. 대신 화면 중앙, 가장 시선을 끄는 위치에 죽은 아들 그리포네토와 그리포네토의 아내 제노비아 스포르차Zenobia Sforza가 배치돼 있다. 발쪽에서 예수의 시신을 들고 있는 청년의 얼굴이 그리포네토이며 예수의 손을 잡고 슬퍼하는 막달라 마리아의 모델이 제노비아였다고 한다. 아들과 며느리의 모습을 그림 속에 넣은 건 아마도 아탈란타의 부탁 때문이 아닐까 싶다. 죽은 아들의 생전 모습을 두고두고 보고 싶기도 하고,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며느리가 안쓰럽기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굳이 그리포네토를 화면 중앙에 배치한 것은 아들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헤아린 라파엘로의 특별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본다. 아탈란타가 이 그림에 크게 만족했다는 걸 보면 나름 그럴 듯한 이야기다.
이 작품은 아탈란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산 프란체스코 알 프라토의 발리오니 예배당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1608년 로마의 실세 쉬피오네 보르게제Scipione Borghese 추기경이 이 그림을 가져가 자신의 개인소장품으로 만들었고 1903년 보르게제 가문이 수집한 방대한 미술품들이 이탈리아 정부에 귀속되면서 오늘날로마에 있는 보르게제 미술관Galleria Borghese 소장품이 되기에 이르렀다(이 때문에 이 그림은 <보르게제의 데포지찌오네Deposizione Borghese>라고 흔히 불린다). 페루자에서도 이 작품과 똑같은 그림이 여전히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보르게제 추기경이 라파엘로의 진품을 가져가면서 대신 만들어 준 모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