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효진 Feb 03. 2023

30년 만에 펼치는 세광 피아노 명곡집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1악장 테마 도전기 1

작년 가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캐럴을 연습해서 녹음해 보자는 둘째의 제안에 근처 음악학원을 검색하였다.  열 곳 정도 통화를 하고 네 곳 방문을 하고 정한 J** 스튜디오. 주차도 되고, 레슨비도 합리적이며 무엇보다도 원장님, 강사님들의 음악 내공과 열정에 신뢰가 갔다.  딸은 바이올린, 나는 피아노 레슨을 받으며 '고요한 밤'과 '라스트 카니발'을 녹음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이사 후 마무리 (그래요 또 이사..) N 잡 수행,  한파가 들이닥친 날 보일라고장등으로 피로와 염려가 겹치면서 집안 청소하던 중 손가락을 다치게 된 것.  뼈가 다친 것도 아니니 밴드를 붙인 채로 연습을 해 보려 했지만 너무 어색하고..  악기 전공하는 사람들이 몸을 왜 그리 사리는지 알 것 같았다.  바라던 딸과의 바이올린/피아노 듀엣 녹음은 미루어졌지만 새해 달력에  2월부터는 매주 목요일 1주 1 레슨을 이어가기로 표시했다.


악보를 미리 찾아보고 어떤 곡을 연습할지 선생님과 미리 상의하고자 했지만 레슨 당일이 돼서야 책을 찾아볼 여유가 생겼다. 손에 잡은 두 권의 악보집은,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몇 년 포장도 풀지 않았던 ' 연주 동영상이 있는 스튜디오 지브리 OST 베스트 (Original piano ver. 삼호 ETM, 2016)과 피아노 명곡집 1 (세광음악출판사, 1990).  


아이들 덕에 알게 된 히사히시 조의 영화음악 마녀 배달부 키키의 바다가 보이는 마을을 한번 연주해보면 멋질 것 같았다.  바이올린과 함께 해도 좋을 것 같고 일단 악보가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는 않았다.  두 번째로는 정말 중학교 때 삐걱대는 피아노로  왼손 오른손 따로 8마디씩 100번 치고 맞추고 했던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엄마에게 악보 보는 방법만 겨우 배운 10대의 내가 이 곡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일단 a단조라 악보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수많은 임시표와 이태리어로 된 부호와 표현방법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는 빨간색 아주 두꺼운 하드커버의 피아노 책이었는데 오랫동안 그 책은 보지를 못했고 나중에 엄마가 구해준 세광피아노 명곡집 1 이 그래도 집에 남아 있어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피아노 개인 레슨은 거의 생애 처음인 것 같다.  첫아이 출산 후 석달간의 출산 휴가를 받고,  쉬는 거니까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해서 개인레슨을 받고 싶어서 피아노 선생님을 집으로 초빙한 적이 있는데 두 번 오시더니 먼저 좀 어려울 것 같다고 사표를 쓰셨다.  간난쟁이를 옆에 두고 피아노 레슨이라니.. 좀 철이 없었던 것도 같다.  


음악 학원에 30분 즈음 먼저 도착해서 (우리 학원은 수강생에게 1주 1회 무료로 연습실을 제공한다) 30년 만에 그리그의 악보를 펼쳤다.  집에는 전자 피아노만 있어서 어떤 강도로 피아노를 누를지 영 감이 안 잡힌다. 그래도 몇 번 반복하니 멜로디가 들리는 듯하다.   


이제 레슨 시간.  올해 아들을 초등학교에 보내는 미녀 워킹맘 선생님.  '학교'에 아이가 가게 되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과는 달리 공교육의 '학부모'가 되었다는 생각에 정말 나도 아이도 많이 컸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서 피아노 선생님을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어떤 곡을 연습할지 함께 선생님과 의논하여  Lange의 꽃노래 (Blumenlied)와 Grieg의 피아노 협주곡 테마 (Theme, Piano Conerto)를 배우기로 했다.  그리그는 특히 선생님이 대학시절에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곡이라고 애정을 보이셨고 원 악보와는 다르게 편곡이 되었지만 큰 무리는 없다고 하셨다.  오케스트라 부분도 한 개의 피아노로 다 연주하는 편곡이라 좀 무리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잘 표현된 악보라고 하셨다.  편곡과정에서 누락된 임시표로 조성이 완전히 바뀐 부분도 있어서 함께 수정해 가며 일단 한번 훑어 보았다.  피아노든 영어든 혼자서 독학으로 할 수 있다고 고집스럽게 생각했던 나는 이번 레슨을 통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악보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부분을 정말 세심하고 이해가 잘 되게 설명해 주시고 연주로 보여주셨다.


이제 한 주간 동안 집에서 열심히, 페달도 없고 터치도 완전히 다른 전자피아노이지만, 일단 손가락의 번호를 잘 익혀두어야 한다.  그래서 기능적인 부분을 외워 두어야 레슨 때 음악적인 부분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번 주부터는 작품반. 레슨비도 10% 높다.  그만큼 더 열심히 재미나게 해야지.  33년 전에 엄마가 사다 주신, 그리고 내 이름을 앞표지에 대문짝 만하게 써주신 세광음악출판사의 피아노 명곡집 덕분에 어쩌면 나는 너무 늦기 전에 몇 곡의 피아노 명곡을 연주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오래되어 군고구마 봉투 같은 색이 된 악보.  그 책 표지에 검정 메직으로 크게 내이름을 써놓으신 엄마.  힘들고 누추한 일상 중에도 가끔 햇살 좋은 오후에 소녀의 기도 (The Maiden's Prayer, T. Badarzewska)와 은파 (Silvery Waves, A.P.Wyman)를 연주하시던 엄마의 트레몰로 (tremolo)가 들리는 듯 하다.   높은음에서 낮은 음으로 또는 그 반대로 스케일을 연주할때 손을 따라 스윙하듯 욺직이는 엄마의 어께를 지금이라면 살포시 안아 드렸을텐데...  삶이 녹녹치 않아도 평생 음악과 가까이 또 좋아하는 것을 추구 하면서 살아가라는 엄마의 메시지가 이 오래된 피아노 명곡집에 들어있는듯 하다.

작가의 이전글 Democracy Dies in Darknes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