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시나무
초등학교 2학년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오래 살던 동네를 떠나 컨테이너 부둣가 신축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장기주택마련대출로 부모님이 결혼 10여 년 만에 처음 장만한 집이었다. 우리 아파트는 6층짜리 3개 동이 전부인 조그만 단지였다. 돌산의 한쪽을 깎아 지은 탓에 땅을 파기 어려워 지하 주차장이 없고, 산 위쪽으로는 부산외국어대학 건물 아랫동이 얼핏 보였다.
매년 태풍 때만 되면 나는 돌 비탈이 무너지진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하지만 식물들은 깎아지른 비탈에 잘도 뿌리를 내리고 자랐다. 특히 커다란 아까시나무는 무거운 몸을 어떻게 지탱하는지 신기하게도 매해 무성한 잎을 드리우고 꽃을 피웠다. 오뉴월이면 아파트 단지를 향기로 물들였다. 꽃이 한창인 시기에 창문 단속을 게을리했다가는 길을 잘못 든 꿀벌이 집 안으로 난입해 한바탕 작은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는 베란다 창가에 팔을 괴고서 하얀 꽃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달린 아까시나무 가지가 놀이터 위로 늘어진 모습을 구경하곤 했다. 이따금씩 놀이터에 앉아 떨어진 가지를 가지고 놀았다.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이파리를 하나씩 뜯어가며 첫사랑 소년의 마음을 점쳐 보다가, ‘좋아하지 않는다’에서 잎이 다하면 줄기까지 하나로 쳐줘야 한다고 억지 위안을 삼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고향집을 떠난 후로 서울 도심에서는 좀처럼 아까시나무를 볼 수 없었다. 아카시아 향도 까마득해졌다. 그래도 아까시나무를 떠올리면, 그 시절 유행했던 아카시아 껌 맛처럼 유년의 달콤하고 유치했던 추억들이 되살아났다.
비슷한 또래였던 자녀들이 모두 장성해 떠난 후 고향집 아파트 단지는 거의 실버타운이 되었다. 어린 시절 이웃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돌아가시고, 청춘이던 엄마 아빠와 이웃 아줌마 아저씨는 어느덧 백발노인이 되었다.
어느 해인가 주민대표회의에서는 명절 주차난이 이슈가 되었단다. 모처럼 부모 집을 찾는 아이들이 차 댈 곳이 마땅찮아 고생한다며 주차공간을 늘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결국, 찾는 이 없어진 놀이터를 밀어버린 자리에는 주차장이 들어섰다.
사람도 떠나고 놀이터도 사라졌지만, 아까시나무만은 30년 넘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올해도 꽃을 피웠다고 한다. 고향집 아까시나무를 떠올리면, 자식들이 어디쯤 왔나 창밖으로 목을 빼고 두리번거리는 늙은 부모님의 얼굴이 그려진다. 잎으로 점쳐볼 것도 없이 그 마음은 ‘좋아한다’ 일 것이다. 이제 아까시꽃 향기는 내게 가슴 저릿한 그리움의 향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