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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오바니 Mar 10. 2023

똥차가 이렇게 반가울 일이야?

정화조가 설치되어 있는 주택은 꼭 1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정화조 청소를 해야 한다. 보통 집집마다 매년 초 청소를 해서인지 이맘때만 되면 예약 잡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이 넓은 면단위 지역에서 운영하는 업체는 단 두 개. 매번 전화 연결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통화 연결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예약 가능한 일정을 물으면 매번 '나중에' 다. 이번에도 가까스로 연결이 되었지만 역시나 '작업 중이니 나중에 전화하소'라는 어르신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 시간 후에 또다시 전화를 했으나 역시 가까운 시일 내엔 어렵다는 통상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얼마나 나중일까요?"
"그건 모르지 이번 달 말이나 될켜".
"그럼 문자로 주소라도 남겨드릴까요?"
"주소 같은 거 줘도 몰라... 그 집이 삼계탕집 가는 길에 있나?"

"어느 삼계탕집을 말씀하시는 건지... XX 복지회관에서 서쪽으로 좀 가시면 있는 하얀 집이요~ 저번에 오셨었는데 기억나세요?"
"그려? 젊은 사람이 갔었나?"
"아니요 어르신 직접 오셨었는데요"
"내가 갔었나?... 혹시 그 대문 있던 집?"
"네 그 집이요~"

이걸 마무리하고 돌아가야 마음이 편할 텐데... 아무래도 이번주에 청소하겠다는 건 내 욕심인 듯하다. 별 수 있나. 나중을 기약하고 서울 갈 짐을 싸는데 옆집 엄마에게서 톡이 온다. "오늘 올라가죠? 잘 올라가세요. 전 정화조 청소차 기다리는 중이에요~"

오! 어디선가 서광이 비추는 느낌이다. 그녀를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내가 없을 때 우리 집도 관리해 주고 꼼꼼하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그녀와 금세 가까워진 터였다. 그 업체에 여기까지 오신 김에 우리 집도 좀 부탁해봐 달라고 득달같이 전화를 걸었다.
 "우리 집 청소하고 위생차 용량 남으면 해 주신데요~" 아까 전화해서 사정했던 어르신 말고 젊은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두 번째 업체다. 제발 옆집 똥통이 적게 찼기를 바라며 두 근 반 세 근 반 상기된 얼굴로 한 10여분을 기다리니 밖에서 우리 집 쪽으로 다가오는 차 소리가 들린다. 똥차가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갑자기 횡재한 기분으로 신이 나서 버선발로 마중을 나갔다. 청소차 옆에서 물도 받고 나름 청소 지원에 나선다. 정화조 뚜껑을 열자마자 서울에선 상상도 못 할 악취가 코를 찌르다 못해 마비된 것처럼 얼얼하게 만들지만, 난 서울 가기 전 끝마쳤어야 할 숙제를 운 좋게 완료해 낸 것에만 정신이 팔려서인지 기분이 아주 상쾌하다.

서울에 가면 우리 집 변기를 통해 내려가는 오물이 어디로 가는지 관심조차 가질 필요가 없는데 이곳에선 집과 관련된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집주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화조는 잘못 관리하면 불쾌한 냄새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매번 신경이 쓰인다. 그래서 집에 내려오자마자 꼭 하는 것이 있다. 정화조 내에 살고 있는 미생물들에게 밥을 주는 것이다. 커다란 정화조 뚜껑을 열고 고기밥을 주듯 무언가를 뿌리는 모습을 상상했다면 거기서 스톱! 종이컵 한 개 분량의 바이오 제재를 변기에 뿌리고 물을 내리면 끝이다. 이런 꾸준한 보살핌으로 미생물들이 잘 살아남아야 정화조에서 나는 냄새를 방지할 수 있다.

그런데 한 번은 기암 할 일이 있었다. 매달 내려오진 못했어도 올 때마다 밥도 잘 주고 정화조 미생물 발생기도 고장 없이 잘 돌아가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뭔가 께름칙했다. 내 예민한 코가 밤이 되면 어디선가 냄새가 올라오는 듯한 미심쩍은 기운을 느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청소해주시던 이모님께서 락스를 엄청나게 뿌려서 욕실 청소를 하셨던 모양이다. 물론 변기 청소에도 락스를 사용하셨고 그 독한 화학제품에 미생물들이 죽어나갔을 건 당연지사. 미처 주의사항을 제대로 전달해 드리지 못한 내 잘못이었다. 락스뿐만 아니라 변기물을 파랗게 만드는 클리너도 사용하면 안 된다. 사람을 위해선 병균을 죽여주는 그 고마운 것들이 미생물에겐 그저 극약일 뿐.

사실 이번에 내려온 목적은 정화조 청소가 아니었으나 기약 없이 어르신 전화를 마냥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만으로도 그 어떤 때보다 뿌듯한 성취감이 느껴진다. 두 집 청소 후 배를 든든히 불린 똥차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내년에도 이런 행운이 있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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