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대한 자연 속으로 >
캉딩에서 신두치아오(Xinduqiao)로 가는 길은 지금까지 봤던 그 어떤 풍경보다도 더 아름답다. 우선 해발 4300m 절다산(Zheduo Mountain)을 넘어야 하는데, 자전거 여행자에게는 고난의 시간이지만 그 길 위에는 모든 고난을 충분히 감내할 만큼의 보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캉딩 시내를 벗어나자마자 오르막이 시작되는데 정신없이 페달을 밟다가 잠시 쉬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낮은 언덕(?)에 가려져 있던 높은 설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르막은 천천히 일정한 속력으로 올라가야 힘들지 않은데, 설산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느라 몇 번이고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오르는 도중 널찍한 주차장에 전망대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보는 풍경은 잠시만 보고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비록 낮 2시경이었지만 주변에 점심을 해결할 식당도 있었고 텐트를 펴기에 적당한 공간이 있었기에 오늘은 여유를 부리기로 한다.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와서 해가 질 때까지 의자에 앉아 웅장한 설산을 바라보며 책을 읽었다. 이처럼 즉흥적으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전거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나에게 자전거는 자유도와 기동성, 그 두 가지 중 어느 한쪽에도 편중되지 않고 균형을 이루는 최적의 이동 수단이다.
이렇게 압도적인 자연을 마주하고 있으면, 이곳에 애니미즘이나 샤머니즘적 성격을 가진 원시신앙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게 이해가 간다. 티베트의 원시신앙인 '뵌뽀'교는 처음에는 카일라스산(뵌뽀, 자이나, 힌두, 티베트불교 모두의 성지)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가, 점차 티베트 고원으로 전역으로 확장된다. 그들은 자연물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고 정령을 숭배했으며 초월적인 힘을 얻고자 했다. 뵌뽀 신앙을 토착화시킨 샹슝 왕국은 7세기 토번의 송첸감포에게 병합되는데, 이후에 자리 잡은 불교는 뵌뽀를 대신하게 된다. 그러나 뵌뽀 신앙은 마을 단위의 제사나 달라이 라마 선출 같은 신탁에 여전히 관여하며 불교화된 채로 전승되고 있다.
다음날 이른 새벽, 일출을 보려 텐트 밖을 나섰는데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가시거리가 10미터 정도쯤이나 될까, 눈으로 덮인 자전거와 텐트 말고는 짙은 구름에 모든 것들이 가려져 있다. 일출을 보는 것은 고사하고 이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냥 하루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그냥 텐트 안에서 책을 읽으며 하루를 보내기로 한다. 근처에 식당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만일 어제 계속 올라가다가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캠핑했다면 더 곤란했을 것 같다.
그다음 날은 정말 거짓말처럼 구름이 싹 걷히면서 따가운 햇살과 검푸른 빛이 감도는 맑은 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으로 덮여 젖어있던 텐트는 햇살이 비추고 얼마 되지 않아 금세 말랐고, 안에서 습기를 머금은 침낭이나 옷가지 등 모든 것들을 한참 동안 볕에 널어둔다. 모든 것들이 보송보송해지면 준비 완료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2박 3일을 머물면서 충분히 쉬었고, 이제는 다시 1000m 이상을 계속 올라가야 한다. 하늘엔 구름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강렬한 햇빛만이 남았는데, 차가운 공기와 따가운 햇볕에 옷을 벗었다 입었다 하기를 수차례나 반복할 수밖에 없다. 땀이 나지 않도록 잘 조절하는 게 정말 중요하기 때문이다. 50kg의 무게를 지고 고산지대를 오른다는 것... 평상시보다 호흡이 쉽게 가빠지고 확실히 더욱 자주 쉬게 된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길가의 야크들과 인사를 하며 오르기를 몇 시간째, 산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캠핑하기 적당한 공터를 발견했다. 티베트 룽따와 타르초가 있는 곳이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캠핑하기 좋은 장소는 아니다. 룽따(바람의 말)라는 깃발은 불교 경전이 적힌 천이고 바람의 말이 달려 나가듯 부처님의 말씀이 퍼지길 바라는 의미에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 걸어두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주위가 트여 있고 경치가 좋아 별 사진을 찍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판단했고, 그런 의미에서 나에겐 캠핑하기 좋은 장소인 셈이다.
텐트는 룽따 안에 엄폐시키고 오랜만에 로프도 꺼내어 고정시켜 바람에 대비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하더니 정말 무서울 정도로 심해졌다. 물론 텐트는 꿈쩍도 하지 않지만 그 정도로 심한 바람은 태풍 말고는 겪어보지 못했다. 다행히 저녁에는 바람이 조금 잦아들었지만 기온은 급격히 내려갔다. 침낭 속에 몸을 뉘어 그 안은 포근함이 느껴졌지만, 오늘은 보름이기에 지체할 시간이 없어 망설임 없이 밖으로 나왔다. 보름엔 달빛이 너무 강해 달이 동쪽에 있을 때 서쪽 하늘 정도만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달은 이제 동쪽에서 막 떠오르기 시작했는데도 하늘에 밝은 형광등 하나를 켜놓은 듯, 주위의 모든 것들은 달빛을 받아 저마다의 새로운 빛깔을 내보인다. 나는 얼어붙은 손을 녹여가며 멋진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달빛은 별을 찍는 데는 한없이 원망스럽지만, 주위의 멋진 풍경에는 한편으로는 좋은 조명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런 때는 별이 아니라 풍경이 주연이고 별은 조연이 된다. 나름 만족하며 텐트로 돌아와 이것저것 정리를 하고 글을 읽다 잠을 자려 애를 쓴다.
온기를 머금은 침낭 속은 폭풍이 몰아치는 겨우 한 발자국 밖의 세상과 더욱 대비되어 그런지 더없이 포근하다. 텐트를 둘러싼 룽따가 바람에 펄럭이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개(늑대였을지도) 울음소리, 4000m 넘는 곳을 새벽까지도 쌩쌩 달려대는 트럭 소리, 오늘도 역시 익숙하지 않은 이 상황을 즐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