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도서 번역자에게 묻다 Part 7
대상 독자: 도서 번역 초심자
이 포스트는 유튜브 영상으로 제작한 '번역 FAQ - IT 도서 번역가에게 묻다'를 텍스트로 정리한 내용입니다. 영상은 50분의 강의 시간에 맞추느라 일부 내용이 편집되었는데 텍스트 버전은 영상에서 잘린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50분 전체 강의 내용을 소개 1개와 FAQ 8개의 포스트로 나눠서 올립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 공정이나 역할과 책임 등을 소프트웨어 개발 프로세스나 R&R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IT 업계 종사자가 아닌 분은 해당 내용을 건너뛰셔도 됩니다.
이제 마지막 주제네요.
‘번역을 왜 해요? 번역하면 뭐가 좋아요? 번역할 때 뭐가 힘들어요?’라는 질문에 대해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먼저 번역할 때 힘든 점부터 살펴보죠.
번역할 때 힘든 점은 의외로 외국어 때문이 아닙니다. 단어를 고르는 게 어렵기 한데 찾아보는 수고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느라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지 대미지가 크진 않거든요.
정작 힘들고 맥 빠지는 건 소통에 있습니다. 질의서를 보냈는데 회신이 늦거나, 작업용 원서 파일이 늦게 올 때 의욕이 줄어들기도 하고요. 편집자와 작업 방식에 대해 조율이 끝났는데 상의 없이 방향을 틀어버리거나,이제까지 진행상황 공유하고 리뷰도 끝났는데 딴소리를 할 때는 멘털이 무너지죠.
사실 원서 파일이 늦게 오는 건 대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온 샘플 원고 보면서 작업하면 되거든요. 질의서 회신 늦는 것도 괜찮습니다. 플랜 A, 플랜 B 모두 만들어 놓고 의사결정 나는 대로 적용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편집자와 합이 맞지 않을 때는 대미지를 회복하기 힘듭니다. 번역자는 번역할 주제에 대한 전문가겠지만 편집자는 출판 분야의 베테랑이죠. 대부분의 경우이면 편집자의 판단이 옳습니다. 다만 사전 협의했던 일이 상의 없이 번복되거나, 저자나 베타 리더의 확인까지 받은 내용이 버려지는 상황이면 얘기가 달라지죠. 진행 과정을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생기는 건 그간의 상황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는 얘깁니다. 명백하게 변화 관리의 실패고, 품질 관리의 실패죠.
판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이런 일이 생기면 멘털이 깨지면서 작업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물론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방만한 태도에서 기인하고, 개선할 문제로 인식되지 못한다면 작업한 게 아깝더라도 계약을 파기해야 합니다. 계약은 신뢰할 수 있을 때 유지할 수 있거든요.
처음 번역을 하게 되면 출판사나 편집자의 스타일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몇 번 작업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합을 맞출 방법을 체득하거나, 주변 번역자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성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출판사나 편집자도 번역자의 태도나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잘 들어맞을 때 좋은 책이 나올 확률이 높아집니다. 어느 정도 번역에 자신감이 생기면 함께 협업하는 분들에게 자신의 스타일과 접근 방식을 터 놓고 얘기하고 차이는 인정하되 서로가 극복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번역이든 뭐든 결국 사람이 하는 겁니다. 나의 약점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나의 강점을 잘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두 손 꼭 잡고 끝까지 완주하길 빌어봅니다.
마지막으로 ‘번역을 왜 하나요?
어떤 점이 좋아요?’라는 질문입니다. 일단 번역으로 돈을 벌긴 힘듭니다. 시급으로 치자면 편의점 알바가 훨씬 많이 받거든요. 이건 번역 단가가 싸다는 얘기가 아니라 일정 수준의 품질을 유지하려면 재작업 시간이 늘어난단 얘깁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금전적인 이익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의미를 두시는 게 좋은데요. 먼저 여기저기 흩어진 지식과 경험을 하나의 책으로 정리하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성취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블로그나 유튜브에도 정보는 많지만 하나의 주제를, 하나의 관점으로 엮는 데는 책 만한 게 없거든요. 그리고 작업된 책을 세상에 선 보이면 자신의 재능으로 사회에 기여한 것 같아 만족감도 커집니다. 회사 업무에서 만족하지 못해서 무력감에 빠졌더라도 관심 있는 주제로 실력을 발휘했으니 자기 효능감도 채워지고요.
그 밖에도 외국어 실력은 더 나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지가 되고, 한국어 실력은 놀랄 정도로 향상됩니다. 고등 교육을 마친 성인도 생각보다 맞춤법을 많이 틀리거든요. 마지막으로는 인적 네트워크가 있습니다.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데요. 세상에 살면서 접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도 독자나 저자, 베타 리더라는 이름으로 만나게 되니 시야가 넓어지고 활동 폭이 커집니다.
이건 절대 돈으로도 못 사요. 예전 같으면 말도 못 붙이는 분이지만 용기 내서 다가설 수 있고,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거죠. 번역서가 일종의 초대권이나 출입증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심지어 이런 네트워크가 해외까지 연결되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책이라는 매개물로 더 많은 친구를 만들어 보세요.
이렇게 해서 자주 물어보는 질문을 정리해봤는데요.
사실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도 많습니다. 남은 얘기는 다른 주제로 기획해서 조금씩 소개드리도록 할게요. 요컨대 IT 도서 번역자를 꿈꾸신다면 외국어보다는 한국어를, 돈보다는 자기 효능감을, 지식보다는 사람 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할 때 번역이라는 마라톤을 성공적으로 완주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뵐게요. 안녕히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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