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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시 Mar 06. 2022

우리는 길들여진 남이다

비밀을 공유하는 인간관계에 관하여

비밀을 갖는 것이 잘못된 일인가, 고민했던 적이 있다. 나의 유년기는 지금보다 훨씬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밖에서 있었던 자잘한 사건들까지 모두 그녀와 공유하며 살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배웠다. 그러면서도 ‘밖에서 있었던 일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오지 말라’는 말에 혼란스러웠다. 지금에서야 자신의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교육하기 위함에서 나온 말임을 안다. 하지만 예민한 언니를 대신해 말 잘 듣는 착한 딸이어야만 했던 그때는 비밀을 간직한다는 것이 죄를 짓는 기분이었고 어디까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대화와 침묵이라는 선택 사이, 어쩌다 보니 나는 조용한 아이로 자라 있었다.

 

비밀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이고, 둘째는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이다. 이 둘은 의미가 비슷하지만, 전자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숨기는 것’에 해당하고 후자는 ‘얻지 못한 내용’에 초점을 두고 있다. 후자의 경우 숨긴 이의 의도와는 별개로 ‘알려지지 않은 것’에 좀 더 초점을 두고 있기에 ‘의도와 상관없이 그저 말하지 않은 것’도 비밀이 된 경우로 포함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비밀을 ‘얻지 못한 내용’ 보다 ‘의도적으로 숨긴 것’에 초점을 두고 받아들이는 상황 지속 때,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단지 얘기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 우정을 키우는 것은 좋지 않다. - Lawana Blackwell


사람은 살다 보면 자신과 관련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관계중심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비밀을 지켜내기쉽지 않은 일이다. 학창 시절, 고민 상담을 위해 나에게 온 친구 중에는 ‘걔, 나한테는 그 이야기 안 했는데 다른 애들한테는 했더라.’ 혹은, 그와 관련하여 ‘그래도 나는 걔한테 할 얘기 다 해줬는데 나한테도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냐?’와 같은 토로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자신의 친구가 자신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는 것, 자신에게만 의도적으로 숨긴 것 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화가 난 경우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밀을 공유하고자 하는 것은 ‘남에게 숨길만 한 이야기’를 둘, 혹은 소수만이 공유함으로써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내재되어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개인의 자유이자 권리이다. 그럼에도 비밀이 관계의 깊이를 재는 절대적인 척도로 쓰이며 암묵적으로 비밀 공유를 강제하는 관계는 서로에게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올바른 관계라 보기 어렵다.


<어쩌다 어른>이라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관계에 관한 강의를 진행했던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과 권수영 교수는 친밀관계와 밀착관계의 차이점에 관하여 두 줄과 세 줄의 차이는 관계 안에 가 있느냐, ‘나의 경계가 있느냐이다.”라 말한다. 여기서 두 줄에 해당하는 친밀관계는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나’가 존재할 가능성이 높은 관계이고 밀착관계의 경우 자신과 상대방의 경계가 모호하여 상대방에게도 나의 결정권이 존재하는 경우이다. 상대방에게 나와 관련된 일을 모두 보고해야 하고 확인받아야 하는 관계라면, 그것은 가족이든 친구든 상관없이 밀착관계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밀착관계는 집착에 가까운 지나친 친밀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으로 과도할 경우, 가정폭력이나 데이트 폭력 등의 병리적인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누군가에게 길들여지도록 자신을 허락한 사람은 반드시, 눈물 흘릴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중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서 조종사가 어린 왕자와의 이별을 직감하고 그가 해준 여우 이야기와 함께 상기한 위의 문장처럼, 밀착관계든 친밀관계든 상관없이 우리는 상대방과의 관계를 유지할수록 그러한 관계의 형태에 길들여진다. 밀착관계처럼 개인의 영역이 없는 관계에 익숙해지면 결국, 비밀조차 믿지 못하는 의구심이 서로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물리적, 심리적인 개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친밀관계를 지향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비밀도 타인의 존재로 생겨난 것이기에 각 개인의 비밀을 함부로 캐묻거나 공유를 강제하지 않아야 한다.


어머니와 사람 관계에 관한, 특히 가족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나누며 어머니와의 대화가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머니는 이제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은 비밀들을 일일이 캐묻지 않았고 나는 그녀로 인한 과거의 고통에 휩쓸려 은연한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점이다. 밀착관계로 인한 과거의 아픔에 사로잡히기에,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늙어가고 있다. 어머니와 나는 각자의 경계에서 아픈 과거를 회복하기 위해 말하고 행동하며 다시, 서로를 길들이고 있다.     




커버 사진: Photo by Luana Azevedo on Unsplash

내지 사진: Photo by Vitolda Klei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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