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공기, 바람, 꽃과 나무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주말에는 과일이나 주스, 고구마, 토스트 같은 가벼운 아침을 먹고 나서 집 근처 공원으로 남편과 함께 산책을 나가는 것이 루틴이다. 햇볕, 바람과 공기, 그 모든 것이 좋아서 가볍게 나가는 날도 있지만, 걷기라는 최소한의 운동을 해야 좋을 것 같은 숙제처럼 억지러 나가는 날도 있긴 하다.
자꾸 게을러지려는 나를, 그나마 집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아파트 근처 공원의,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들, 꽃과 풀들이다. 요즘은 연초록빛에서, 짙어져 가는 잎들까지 다양한 농도의 푸르름, 아카시아꽃의 진한 향내가 섞여 겨울, 봄과는 다른 공기를 느낀다.
연초록에서 짙은 초록까지 푸르름이 짙어가고 있는 아파트 숲 사이의 탄천 산책길. 탄천길은 이 도시에서 힐링을 주는 공간이다 옷을 챙겨 입고 안방에서 현관문 앞까지 가는 길이 가장 멀고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날이면), 현관 문턱만 넘어서서 나가면 계절이 변해가는 신비와, 바람과, 새가 지저귀는 소리, 빛과 달라지는 공기를 느낀다. 그리고 이내 상쾌해진 기분으로 "안 나왔으면 후회할 뻔..."이라고 거의 매번 같은 생각을 한다.
더더구나, 미세먼지가 없는 날을 만난다면, 그런 날은 덤으로 여분의 행복이 내게로 선물처럼 전달되는 느낌이 드니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얼굴에 잡티가 생기더라도 햇살을 듬뿍 받으며 걷는 동안, 목덜미와 등 뒤가 기분 좋을 만큼 따갑게 내리쬐는 느낌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아름다운 사계절을 걷고 싶다
봄에는 벚꽃과 개나리꽃을, 여름에는 아카시아 향기와 토끼와 오리들을 (최근엔 아기오리들이 태어나 엄마 오리 뒤를 졸졸졸 뒤따라 다니는 모습들이 너무 귀엽다. 엄마 말 잘 듣는 새끼오리들, 오리 엄마도 부럽다). 가을에는 낙엽이 있는 숲을, 겨울에는 태양이 반사되어 공원호수에 유달리 반짝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엠마 미첼 (Emma Mitchell) 이 "야생의 위로 (The Wild Remedy)"에서 말했던 "...... 산책은 차를 끓이는 일상의 사소한 의식이나 털실뭉치로 장갑을 뜨는 일처럼 마음에 위안을 주지만 그 느낌은 매번 다르다." 글처럼 누군가는 매번 똑같은 길과 나무, 풍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날그날 빛과 공기가 다르듯, 내 마음도 다르고 산책의 느낌도 같을 수가 없다.
탄천변의 아름다운 야생화들 아파트 뒷길로는 중앙공원이 이어져 있고, 앞쪽으로는 가깝게 율동공원 가는 길로 이어진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야 운동이 되는 것을 잘 알지만, 공원과 탄천을 따라 늘어선 주변의 나무들도, 야생들꽃들인 '애기똥풀', '제비꽃', '황금달맞이꽃', '봄까치꽃', '붓꽃' 같은 들풀과 꽃들도 쳐다보고, 하늘도 올려다보면서, 예쁜 장면은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어 잠시 머물기도 하면서 천천히 걸을 때가 더 많다.
중앙공원으로 가는 좁은 숲길을 지나 야트막한 산등성이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정자가 있다. 정자 위에서 바라다보는 오래된 신도시의 모습은 사각형의 빽빽한 아파트 숲과 계획된 도로들로 규칙적인 도시의 밋밋하고 획일적인 선 들뿐이지만, 신도시가 오래되어 제법 도시의 나무들이 커다란 그늘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산등성이에서 쭉 내려가면 야외 공연장과 넓은 잔디밭이 나오는데, 이 넓은 야외공연장도 코로나 때문에 기약 없이 휴식 중이다. 코로나가 멈추게 한 일상들이 여기저기 너무도 많다.
"걷기는 하늘과 태양과 바람을 가슴으로 품는 일이고, 빛으로 가득 찬 누리속에서 자유와 고요함 속에서 몸을 끌고 나아가는 활동이다. 걷고 나면 무겁던 몸의 감각은 살아나고, 둔중하던 기분은 훨씬 가벼워지며, 마음은 환희로 가득 찬다. "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중에서, 장석주
율동공원 호숫가를 걷다 보면 어쩌다 호수 주변 번지점프대에서 아찔하게 수직 낙하하는 스릴을 즐기는 용감한 시민들을 보는 날도 있는데, 요즘 번지점프대는 코로나 때문에 계속 휴점 상태로 멈춰 서있다 (겁이 많은 나는 번지점프 타는 일은 평생 없을 것 같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다리가 살짝 아플 즈음, 공원 내에 있는 노천카페에 앉아, 햇빛이 반사되어 수면이 반짝이는 호수를, 그 위로 높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적당하게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을 빠뜨릴 수는 없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카페 앞 산책로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주인을 따라나서 신이 나 한껏 꼬리를 흔들며 주인 앞에 앞장서 걷고 달리는 애완견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공원에 오면, 마치 우리 집만 빼고 다 반려견이 있는듯한 생각이 든다).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촘촘히 느끼고 살고 싶다
2킬로쯤 되는 호수 둘레를 세 바퀴나 돌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는데, 대부분 오래 운동을 한 사람들인지 햇빛에 타서 까무잡잡 건강해 보이는 피부와, 부러운 근육들을 가졌다. 순간, 운동의 강박과 자극을 받지만, 그러나, 다음번에도 나는 습관처럼 그냥 천천히 주변의 나무와 풀과 꽃들을, 오리와 두루미 (청둥오리 일수도)들을 구경하며 걷는다.
매주 마주치는 이 꽃들과 낮을 트고 인사를 하고,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주말에만 나가던 공원을 요즘엔 주중 저녁에도 나갈 때가 많아졌다. 코로나 재택근무로 저녁시간이 더 여유로워진 것 때문이기도 하고, 재택으로 움직이는 시간이 줄어 군살이 늘다 보니 이렇게라도 움직여야 될 거 같은 의무감이 느껴질 때도 있어서다.
이유야 어쨌든, 사계절의 모든 세밀한 아름다움을, 모두에게 공평한 이 공공의 평등한 혜택을 나는 계속 걸으면서 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