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무병장수하세요 | [5] The Black Parade
집 근처에 놀이터가 있습니다. 놀이터는 소가 그려진 판때기가 앞에 있으므로 소놀이터라고도 불렸습니다. 저는 8살 때부터 한 집에 주욱 살았으니 소놀이터가 곧 아지트였습니다.
소놀이터에는 솔방울들이 많습니다. 놀이터 바로 뒤가 소나무 천지입니다. 놀이터 앞에도 소나무 정글이 있습니다. 어릴 때에는 팀을 나누어 놀이터 앞과 뒤에 진지를 구축하고 솔방울 수류탄을 모았습니다. 요즈음은 놀이터에 아이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지만, 그 때에는 모르는 애들도 팀으로 끼워주곤 했습니다. 솔방울을 모아! 그리고 솔방울이 날라오면 1미터 밖으로 피해야 돼! 1미터 안에 있으면 아웃이야!
손에 송진을 묻히기 싫은 날이면 지옥탈출을 했습니다. 혹시 지탈의 기억을 공유하는 세대신가요? 지탈은 실눈이 국룰입니다. 어디 코뼈 나갈 일 있나요. 나중에라도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누군가 '옛날 기억 나게 지탈이나 한 판 하자'라고 하면 술래가 됐다고 해도 절대 얼큰한 몸뚱아리에 붙은 눈을 꽉 감지 마세요.
제작년부터 소놀이터에 고양이 삼인방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두 마리는 흑임자고 한 마리는 치즈입니다. 어디서 왔는지는 모릅니다. 그치만 아파트 단지라면 꼭 세탁소 고양이라던지 편의점 고양이라던지 마을회관 고양이가 있기 마련이니 관심을 기울여본 적 있다면 이상할 일도 아니기는 합니다. 세 고양이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습니다. 고양이는 모래밭에만 똥을 싼다는 사실을 아나요? 이제 우리는 소놀이터에 고양이 삼인방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사실인지 눈치챌 수 있습니다. 푸세식 화장실만 있는 집에서 살다가, 커다란 욕조와 비데와 자쿠지가 있는 옆집이 빈집이라는데 그걸 참겠습니까.
삼인방 고양이는 훌륭한 부동산지반을 등에 업고 팔인방의 대가족이 되었습니다. 취두부 색깔의 회색 고양이 하나와 다수의 검정 고양이들이 추가되었습니다. 사람 손에 나고자란 애들인지라 다섯 애기들은 사람 손을 잘 탑니다. 바닥에 누워서 꼬장을 부리고 편의점 비닐봉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저는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더 케미컬 로맨스의 'To Join the Black Parade'를 흥얼거립니다. 취두부 고양이가 팬텀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여름 날, 너를 Black Parade로 이끌 팬텀을 하나 남겨주려 하기 때문이란다."
[ 어딜 보시는 겁니까, 그건 잔상이라구요 ]
유전의 힘이라는 것은 실로 대단합니다. 당신은 세 고냥이들을 구별할 수 있나요? 구별의 기준이 될 개별의 특징을 캡쳐해낼 수 있나요? 고양이 8인방은 작년인가 제작년인가부터 주욱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또는 격일 소놀이터 앞을 지나 등하교하지만 아직 구별에 성공해본 적 없습니다. 아니, 한 마리만 구별해낼 줄 압니다. 눈이 워낙 땡그래서 자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은 땡글이라고 일단 붙였습니다. 땡글이라고 불러도 원래 이름이 있는지 돌아보지는 않습니다. 아니면 땡글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잘 몰라서 이해가 느린 건지.
어쩌면 구별해낼 수 없도록 닮은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멀티버스에서 온 같은 고양이 일지도 모릅니다. 카피캣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카피캣도 알고보면 다른 캣이 아니라 멀티버스의 같은 캣, 멀티-캣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멍청한 인간들은 고양이조차도 제대로 구별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껏 그들은 시간선의 붕괴니 뭐니 하는 걱정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던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너무나 당연하지 않나요? 까탈스러운 고양이가 무리생활을 하는 방법은 단 하나 뿐입니다. 자기 자신과 무리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식사라던지 카페라던지 놀러 갈 장소라던지 하는 것들을 결정하기가 너무도 편해집니다. "이번에 생긴 카페 봤어?", "인스타에서 보긴 했어", "아 나는 푸딩 별로야", "(다른 두 마리가 놀란 듯 입을 모아)나도야 !"
[ 바람은 선선하고 풀은 싱그러워. 모두들 잘 있는거지 ]
하지만 단 한 마리, 오렌지 멀티-캣만큼은 눈물을 훔치고 있습니다. 오렌지 멀티-캣이라고 불린 것만 보아도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오렌지 멀티-캣의 고향은 다른 평행우주였습니다. 인간이 모두 멸종한 아포칼립스 평행우주 고양이었죠. 어린 까망고양이 멀티-캣 삼총사는 알지 못하겠지만, 3년 전 이 놀이터에서 멀티버스 전쟁이 있었습니다. 멀티-캣과 멀티-독의 싸움이었죠. 그들은 인간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인간 문명이 멸망한 아포칼립스 평행우주로 자리를 옮겨 소놀이터의 한가운데서 지구가 흔들릴 만한 사투를 벌였습니다. 싸움은 보름 밤낮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다친 멀티-캣들과 멀티-독들의 가냘픈 울음소리가 미금역(분당선)을 가득 채웠더랬죠. 결국 하늘의 그믐달과 같이 기세는 기울고, 소놀이터 전장에는 코드네임:켈베로스의 멀티-독 세 마리와 멀티-캣들의 마지막 희망, 오렌지 멀티-캣 한 마리만이 남았습니다. 오렌지 멀티-캣의 뒤에는 다중우주의 오렌지캣들이 널부러져 있었습니다. 때는 이미 다들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난 뒤. 오렌지 멀티-캣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었지만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등 뒤에는 아직 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겁에 질린 까망 고양이 커플이 있었습니다. 산더미와 같은 다친 멀티-캣들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어리고 약한 멀티-캣들이 있었습니다. 오렌지 멀티-캣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돌아보지 않아도 그들의 걱정어린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그들의 비관적인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보도블럭에는 오렌지 멀티-캣 그 자신의 뽑힌 수염 가닥들이 가득했습니다. 치열한 전쟁. 하지만 오렌지 멀티-캣이 조금 더 힘내지 못한다면, 더욱 치열한, 암흑같은 미래가 도래할 것입니다. 멀티-캣들의 날렵한 다리는 멀티-독들의 우유팩에 몰래 구멍을 뚫어 줄 용도로, 멀티-캣들의 나무오르기 능력은 동네 나무에 열매마냥 걸려버린 어린애들의 소프트볼을 내려주는 용도로 남용될 것이 뻔합니다.
오렌지 멀티-캣은 그 날의 사투를 기억합니다. 단 1mm의 정확도도 치명적으로 작용할 삼대일의 싸움에서 숨겨온 비기 풍차돌리기로 멀티-독 세 마리의 콧잔등에 씻기지 않을 치욕을 입혀주었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번개와 같은 상황판단능력으로 근처 나무에서 소프트볼 하나를 내리고, 멀티-독 두 마리의 관심을 흔들어 한 마리를 먼저 처리했던 자신의 무서운 전술을 기억합니다. 자신의 등 뒤에서 들려왔던 희미한 응원의 미야오를 기억합니다. 골골송을 기억합니다. 선선한 바람과 아파트를 가득 메운 덩쿨을 기억합니다.
'모두들 잘 있는 거지'
오렌지 멀티-캣은 홀로 캣니버스를 수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웅과도 같았던 모든 오렌지 멀티-캣들의 숭엄한 기억이 캣니버스의 구석구석을 수호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