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주 May 01. 2023

감상, 그리고 박용철『시문학 창간에 대하야』(1971)

모두들 무병장수하세요 | [4] 공감각의 현현

< 빛 대신 진동으로 (시각의 촉각화) >


글을 잘 쓰는 분을 압니다. 인스타그램에 글을 써서 올리는 분이었습니다. 피아노인지 작곡인지로 음대를 가셨을거라 어림할 뿐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건강이 나빠지셨나 봅니다. 간간히 일기를 쓰듯 한 장의 사진과 세네 문단의 글을 올리셨습니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 기타를 사 볼까? 하는 혼잣말에 그래, 해 보고 싶으면 일단 사 봐,라고 말해주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 건강이 나빠지고 나서 한 켠으로 밀어 두었던 작곡을 오랜만에 해 보는 이야기. 황갈색 낙엽을 찍은 별 것 아닌 사진. 이런 마음이 편해지는 글과 사진을 올리셨습니다. 글 자체도 물론 매력이 있었지만, 글이 아니라 사람에 끌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독특합니다. 작품을 통해 작가에게 매력을 느낀다니. 남몰래 응원하는 마음입니다. 언젠가는 연서를 쓰는 기분으로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하고 댓글을 썼던 기억도 납니다. 소설을 써보고 싶다고 느끼게 된 계기였습니다.


에세이를 쓰기 전에 그 계정을 간단히 확인해 보려고 팔로우 탭에 들어갔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아이디가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 같다가도 명확히 떠오르지가 않습니다. 계정 목록을 죽 내리며 '이런 프로필 사진이었던 것 같은데' 싶은 사진을 눌러볼 때마다 괜히 가슴이 선덕거립니다. 기대가 되다가도 이게 뭐라고 무섭기도 합니다. 저도 모르게 작은 유대감을 가졌나 봅니다. 내적 친밀감을 쌓았나 봅니다. 오랜만에 좋았던 글을 찾아보는 기분이 아니라, 오래 연락을 하지 않았던 친구에게 선톡을 보내는 느낌이랄까요. 저는 잡다한 사진을 올리고 까먹기 좋은 유쾌한 글을 씁니다. 하지만 언제 저런 글을 쓸 수 있을까요.


*


브런치를 시작하고 나서 이곳저곳에 던져둔 글들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언젠가 쓰고 뿌듯하게 올려 둔 글들입니다. 지금 보면은, 그저 부끄럽습니다. 한켠으로는 작년의 나는 이기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뭐든지 마라톤과 같아. 부모님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엉덩이 힘이 진짜 힘이야. 의자에서 일어나지만 않아도 성공할 수 있어.


제가 그간 엉덩이를 붙인 의자는 변기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무언가 소화하려 애썼던 거라고 받아들여 보고 있습니다.


*


이전에 박용철 시인의 『시문학 창간에 대하야』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언젠가 감상에 관련한 논문과 글들을 별생각 없이 찾아다닌 때에 읽었던 글입니다. 어쩌다 찾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해당하는 글은 1971년 박용철 시인을 포함한 다수의 시인들로 창간된 '시문학'이라는 격월간의 잡지 첫 호에 실렸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창작과 감상을 마주해야 하는가에 대한 박용철 시인의 견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중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시라는 것은 시인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한낱 존재이다. 조각과 회화가 한 개의 존재인 것과 꼭 같이 시나 음악도 한낱 존재이다. 우리가 거기에서 받은 인상은 혹은 비애, 환희, 우수 혹은 평온, 명정, 혹은 격렬, 숭엄 등 진실로 추상적 형용사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그 자체 수 대로의 무한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떠한 방향이든 시란 한낱 고처이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흘러내려 온다. 시의 심경은 우리 일상생활의 수평 정서보다 더 고상하거나 더 우아하거나 더 섬세하거나 더 장대하거나 더 격월하거나 어떻든 [더]를 요구한다. 거기서 우리에게까지 <무엇>이 흘러 <내려와>야만 한다 (그 <무엇>까지를 세밀하게 규정하려면 다만 편협에 빠지고 말 뿐이나) 우리 평상인보다 남달리 고귀하고 예민한 심경이 더욱이 어떠한 순간에 감득한 희귀한 심경을 표현시킨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흘려주는 자양이 되는 좋은 시일 것이니 여기에 감상이 창작에서 내리지 않는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경성 옥천동 16 시문학사 발행) (소화 5년, 3,2, 조선일보소재)
‘시문학 창간호’ 중에서, <시문학 창간에 대하야> 중에서.



시문학을 우리가 흔히 접하는 모든 문학이라 확대하자면 - 이런 개념적 확대가 시인의 뜻에 거스르는지는 모르겠지마는 - 문학이라는 것은 고처(高處) 즉 높은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더 섬세하거나, 더 장대하거나, 더 격월하거나. 높은 곳에서 물이 떨어지듯 그 [더]에 해당하는 희귀한 심경이 감상자에게 흘러들어옵니다. 형용할 수 없는 무한수의 감득이 <무엇>을 흘려줍니다.


다만 고처에서 무언가가 흘러들어 오기 위해서는 낮은 곳 또한 필요합니다. 창작물은 감상자가 있어야지만 그 무언가를 흘려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상이 창작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 괜히 내가 뭐라도 된 기분입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제가 어떻게 창작자와 동등한 역할을 하나요.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그치만 저도 분명 수평의 정서보다 고상하거나 우아하거나 섬세하거나 장대하거나 격월한 그 [더]를 느꼈답니다. 저도 분명 몇 가닥의 글들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답니다.


*


최근에는 황정은 작가님의 [아무도 아닌]을 읽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글을 읽으면 작가를 궁금해하게 됩니다. 이렇게 간결한 문장으로 풍부한 글을 쓸 수가 있구나. 그런 감정을 느끼고 나면 오히려 주눅이 듭니다. 괜히 우울감이 옵니다. 꾸준히 저는 제 글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자 했습니다. 때로는 작게 반짝이는 알맹이가 나올 때가 있다가도, 보통이면 흙모래뿐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전에는 그 작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진주일 줄 알고 차근차근 걸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 먼지를 털고 다시금 들여다보면 고작 누군가 모래사장에 깨버린, 곱게 갈린 소주병 파편 같은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쓸모없는 것을 쥐고 있다가 아름다운 글을 마주하고 나면 샘솟는 자괴감으로 손을 털고 의자에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인 겁니다. 하지만 정말 주눅이 드는 것은 그럼에도 손을 털고 싶지 않음을 알아챌 때입니다. 모래인지 소주병 가루일지 모를 좁쌀 같은 것들이라 하더라도 혹여 손가락 새로 흘릴까, 썩은 자두 같은 볼따구를 하고서 경계할 때입니다.




감상에 대해서는 이 문단의 다음 문단에서 재개됩니다.


< 동해 바다 >

저번 달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러 강릉을 갔습니다. 아니면 저저번 달이었을까요. 강릉에는 머구리 횟집이 몇 군데 있습니다. 머구리는 잠수부를 일컫는 말입니다. 같은 뜻의 일본어 단어 모구리(潜り)에서 유래됐다 합니다. 보통 남성 잠수부를 일컫는 말인데, 아이언맨 1에 나오는 마크 1 슈트 같은 무거운 철덩이를 입고서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하지만 총을 든 테러리스트 단체라던지 하늘에서 내려온 보라색 외계인을 잡는 것은 아닙니다. 단단한 외피 덕에 방어력이 강한 조개류와 잽싼 유선형의 몸 덕에 스피드 계열인 물고기 등입니다. 물회에는 회와 세꼬시가 잔뜩 들어갑니다. 이제 벌써 5월인데, 곧 있으면 또 시원한 물회를 먹을 때가 되겠네요.


사진을 찍은 이유는 모래사장을 가득 뒤덮은 솔방울 때문입니다. 불쌍한 솔방울, 그리고 불쌍한 소나무. 소나무는 어떻게 저런 모래밭에서 자라는 걸까요? 저는 생물 쪽으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저 부근에는 따로 흙을 뿌린 건가요? 발 밑이 모래라도 힘찬 소나무는 자랄 수 있는 건가요? 저는 토목 쪽이라서 모래는 마찰각이 낮다는 건 압니다. 아니 반대로 마찰각이 높았던가요? 중요한 건 아닙니다. 몰라도 어려운 용어를 쓰면 무식해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어디나 소나무 밑이라면 솔방울은 진득하게 깔렸던 것 같습니다. 민들레씨를 보면, 저 많은 것 중에 한두 개 겨우 터를 잡겠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치만 민들레씨보다 더 힘든 건 솔방울일 지도 모릅니다. 민들레야 보도블록 사이라도 낑기기만 하면 꽃을 피운다 하지마는, 솔방울은 적당한 부지가 필요하니까요. 게다가 솔방울, 한 개마다 십 수개의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갈래갈래 열린 껍질들 안에 다 씨앗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듬직한 나무로 자라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 선풍기 바람각 조절 (좌 : 상향조정, 우 : 기본) >

에세이도 에세이지마는, 한 꼭지씩 올린다고 또 재밌다고 떵떵거린 소설은 하나의 꼭지를 마지막으로 더는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집 앞 탄천에 나가 벤치에 앉아서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소설을 읽으시나요? 언젠가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몇 편을 읽고선, 이 작가의 문체가 마음에 든다, 고 생각하고 다시 바로 - 혹시 이 문체라는 것은 번역가의 문체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언어를 바꾼다면 문장의 구성도, 작가가 의도한 길이도, 따라서 글의 호흡도, 명확한 단어의 의미도 바뀔 수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작품 활동 초기에 번역투의 문체를 자신의 개성으로 삼았다 합니다. 그래서 글을 비교적 미숙한 영어로 쓰고 다시 일본어로 번역했다고 해요. 번역투의 문체를 한글 번역가가 다시 한글로 번역했으니, 어쩌면 그 문체에 오히려 어울리는 작업이 추가되었을지도 모릅니다.


*


제가 소설을 읽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당연히 제 방식이 좋다고 이야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저 스스로 발견한 하나의 재미있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래서 혹시 교환하자는 마음으로 소개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저는 먼저 소설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눕니다. 첫 부분은 맨 앞 열 페이지 가량의 도입부입니다. 도입부는 독자들의 흥미를 낚아 올리는 힘이 있습니다.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 첫 문단에는 보아 구렁이가 등장합니다. 두 번째 문단은 코끼리를 먹은 보아 구렁이입니다. 책마다 물론 다르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1996년의 포에버북스 7판 버전을 기준으로 다섯 번째 페이지에는 어린왕자가 그려달라고 요구한 양이 든 상자가 나옵니다.


최근의 한글 소설 중에서는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가 떠오릅니다. 바다가 해수욕장에 닿는 모습을 '세상의 끝이 닿는' 모습으로 표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요. 최근 읽었다고 말씀드린 황정은 작가의 [아무도 아닌]은 문장보다 문체가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지마는, '콩 봐라. 어느 틈에 깼는지 오제의 어머니가 뒷좌석에서 말했다. 저 아까운 콩 봐라'라는 문장에서 한 번 책을 덮었습니다. '이런 도입부가 있다니', 하면서 표지를 덮고 제가 써온 한심한 모래더미들을 떠올리며 주눅이 들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으로도 불리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데릭 하트필드'라는 작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에게 고처였던 '데릭 하트필드'는 하루키가 만들어 낸 허구의 작가입니다. 하루키가 어찌나 허구의 이야기에 진심인지, 책의 맨 뒤편 '후기를 대신하여..'에는 자신이 헌책방에서 '데릭 하트필드'의 책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도 추가해 두었습니다. 하루키의 다른 책들 또한 도입부가 강력합니다. [1Q84]는 주인공이 택시 라디오의 노래를 듣고 '야나체크의 <산포니에타>구나', 라고 깨닫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주인공이 자신이 모르는 노래를 이상하게도 알아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자 세상은 1984가 아닌 1Q84로 바뀌게 됩니다.


도입부는 많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 부분 중 마지막 부분은 책의 마지막 장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부분은 책의 열댓 장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입니다. 제가 이렇게 책의 부분을 극단적으로 나눈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책을 펼 때와 덮을 때 읽는 부분이 각각 도입부와 맺음부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책의 중간 부분은 잔뜩 몰입을 해버리는 나머지 소설에 대한 작위적인 분석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책의 마지막 장을 읽고 뒤표지를 잡아 책을 덮습니다. 그리고 책이 가져다준 여운을 조금 느낍니다. 책의 뒷부분은 대개 원치 않은 스포일러를 포함할 수 있기 때문에 상세한 예시를 적어두지 않겠습니다만은, 가장 크고 불쾌한 여운을 남겼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한 문장은 적겠습니다. 88 서울올림픽의 '손에 손잡고'를 작곡하기도 한 조르지오 모로더가 자신의 살아온 인생과 생각을 이야기한 독백의 후반부 문장, '내 이름은 지오바니 조르지오지. 하지만 모두가 날 조르지오라고 부르지'가 연상되기도 합니다. 조르지오 모로더의 독백은  2013년 다프트 펑크의 '랜덤 엑세스 메모리'에 수록된 'Giorgio by Moroder' 에 가사로 차용되기도 했으니 알고 계셨다면 반가울 거라 믿습니다. 아무튼간 [인간실격]의 맨 마지막 문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됩니다. 흰머리가 엄청 늘어서 사람들은 대개 마흔 넘은 나이로들 봅니다.


*


그리고 책의 중간 부분에서는 몇 번씩 끊어 읽으며, 작가의 문체와 표현상의 특징,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사건의 제시, 주요 사건들을 꾸미는 보조 사건의 구분, 인물의 감정 표현 등을 다양하게 찾습니다. 그때부터는 윈도쇼핑이나 글 구경에 가깝다고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진또배기는 모두 이 중간부에 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고 책이라는 건 상대적으로 호흡이 긴 매체가 돼서, 유튜브나 웹툰과는 다르게 여러 번 끊어 읽어야 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책의 중간부에는 독자가 책을 다시 펴도록 만드는 동기가 존재해야 합니다. 또한, 호흡이 긴 만큼 독자가 공감하며 또는 반발하며 느낄 감정을 여유있게 조절해야 합니다. 암울한 분위기만을 유지한다면 불쾌함만 전달될 지도 모릅니다.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만은. 어쨌든 여기부터 중요한 건 꾸준한 호감의 유지와 여유롭고 리드미컬한 분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으로 유지하는 지 적어내리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박용철 시인의 말과 같이 ‘그 <무엇>까지를 세밀하게 규정하려면 다만 편협에 빠지고 말 뿐이나‘.


하지만 제가 애정하는 작가 하루키를 예로 들겠습니다. 다만 하루키 작품의 특징을 골라내는 제 나름의 생각 흐름을 적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읽은 몇 작품을 체 위에 올리고 손목을 탈탈, 털면 그 밑에 하루키의 축을 이루는 중요한 공통점들이 남는 겁니다. 여전히, 제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하루키의 작품은 대부분 무던한 남자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감정에 대한 표현은 절제하고 비유를 곁들인 묘사에 중심을 두려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덕분에 비유의 강점이 자주 드러납니다. 실제로 '히키코모리'라는 단어를 만든 심리학자 사이토 다마키는 하루키의 은유 능력을 두고, 은유 능력이 서로 다른 두 이미지 사이의 점프력이라면, 하루키만큼 멀리까지 점프할 수 있는 사람은 일본 작가 중에 없다, 고 말했답니다. 물론 은유는 단순한 비유법뿐 아니라 하루키 특유의 메타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남의 집에서 잠이 깨면 언제나 다른 육체에 다른 영혼을 우격다짐으로 구겨 넣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하지만 가장 큰 특징은 역시나 대화에 있습니다. 혹시 하루키 작품 특유의 오컬트적인 요소나 초현실주의적인 메타포가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하신다면, 무조건 그 말이 맞습니다. [1Q84]에서도, [해변의 카프카]에서도, [기사단장 죽이기]를 비롯한 다양한 책에서도 의식 세계와 '의식 아래 세계'가 (또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는 꿈을 통해서) 평행하게 진행되는 하루키 작품의 공통성을 분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체코의 <리도베>와 <프라보>라는 두 신문은 2006년 하루키가 '프란츠 카프카 국제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하루키의 메타폴리컬(비유적)하고 메타피지컬(형이상학적)인 특징을 종교나 영성에 연관하여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메타폴리컬과 메타피지컬. 이 발음도 어려운 두 단어는 분명 하루키의 커다란 특징 둘을 설명해 줍니다. 다만 저는 제 개인적으로 느낀 감상에 대해서만 적어 내리고 있습니다.


하루키의 작품이 가지는 비현실성은 전술한 오컬트나 초현실주의나 메타포에서만 오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하루키식 비현실성의 완성은 대화입니다. 하루키 작품의 대화에서는 유독, 두 인물이 서로 연극 대본을 읽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보다 구체적이고 비유적인 대사가 전달되는데, 함께 대화를 하는 상대 또한 미묘한 이질성은 상관하지 않고 같은 눈높이의 대사로 받아 잇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스퇴르는 달라. 그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A는 C, 그뿐이었어. 증명 같은 건 전혀 하지 않았고. 하지만 그의 이론이 옳다는 건 역사가 증명해 주었고, 그는 평생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귀중한 발견을 했어."

"종두."

그녀는 포도주 잔을 식탁에 내려놓고,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이봐, 종두는 제너가 발견한 거 아냐? 그러고도 용케 대학에 붙었네."

"...... 광견병의 항체, 그리고 저온살균이던가?"

"정답."

-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중에서.


또 다양한 부분에서 우리는 작품마다의 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 친구가 추천한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를 반 정도 읽었습니다. 이런 책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책 마다의 역할이 분명 있습니다. 티브이를 돌려보다 나온 위화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소설을 두고, 후대의 젊은이들이 소설이 쓰인 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고 잊지 않도록 역사서의 역할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역할의 책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책들에 대해서 저는 어떤 코멘트도 할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무언가를 논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강렬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소년이 온다]를 읽다 보면, 문장들 문단들을 하나하나 적어두고 코팅해서 예쁜 상자에 넣어두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책을 여러 번 읽고 작은 함에 넣어 보관해야 겠다 싶은 마음이 듭니다.


요즈음은 핸드폰 e북 어플로도 쉽게 읽을 수 있는데 왜 책 읽는 일이 이렇게 어려워졌나요. 유튜브에 올라오는 랜덤 한 게임 영상이 사실은 더 재밌습니다. 요즘은 지식도 유행이라서, 저번 달인가 인스타그램에 '도파민'에 대한 이야기가 우후죽순 생겨났다가 사라진 걸 봤습니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책을 잘 읽지 않는 것은 전부 '도파민' 중독 때문인가요? 아닙니다. 그저 게을러서 그런 겁니다. 세상에 도파민이니 멜라토닌이니 캐러멜이니 뭐니 하는 것들은 사실 없는 겁니다.


*


박용철 시인의  『시문학 창간에 대하야』에는 이런 부분도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적어 두려고 합니다. 문학이 가지는 힘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 한국의 과거 시인들이 얼마나 강인한 사람들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네 문장입니다. 지금에는 이런 우직함이 문학에서는 필요하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의 말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고 또 정말로 그럴 수 있었던 때의 시라는 것은 얼마나 고처의 존재였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걸음을 조용 더듬더듬 걸어가려 한다.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 한때 세상을 시끄럽게 하다가 사라져버리는 것이 되지 않고 우리의 나이를 해로 세이려 한다.

 우리는 무서운 길을 걸으며 그 무서움을 헐기 위하여 무단히 고함치는 버릇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더듬더듬 하는 말이 가장 자신있는 말이요, 더듬더듬 걷는 걸음이 가장 자신있는 걸음일 때가 있다.

(경성 옥천동 16 시문학사 발행) (소화 5년, 3,2, 조선일보소재)
‘시문학 창간호’ 중에서, <시문학 창간에 대하야>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땅에서 독립한 라퓨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