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무병장수하세요 | [3] 패턴은 같은 것들의 반복
어릴 때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천공의 성 라퓨타'라는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디즈니의 '보물성'도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납니다. 둘 다 초등학교 때의 기억일 겁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의 기억은 왜곡되고 어렴풋한 암시만을 남기기 때문에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아직 떠올릴 수 있는 어릴 때의 기억들은 대체로 특별한 향을 동반합니다. 라퓨타를 지키는 이끼 낀 로봇을 떠올리면 왠지 습하고 신비로운 냄새가 납니다. 보물성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요리사 '롱 존 실버'를 떠올려도 표현하기 어려운 향이 있습니다. 때로 향에 대한 기억은 시각에 의한 기억보다 더 짙은 향수를 줍니다. 향수의 향(鄕) 자는 '시골 향'이라는 한자니까 냄새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텐데, 어쩌면 짙은 향수라는 단어의 조합을 대표할 만한 것 또한 어머니의 품에서 나던 그리운 향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저희 어머니는 지금 옆 방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시기는 합니다.
하늘에 떠 있는 섬과 우주를 유영하는 금빛 행성. 천공성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비행기를 타고 폭풍을 뚫어야 합니다. 금빛 행성을 찾기 위해서는 지도를 보면서 방향키를 조종해야 합니다. 방향이라는 것은 동, 서, 남, 북의 2차원이 아닌 땅과 하늘을 포함하는 3차원의 방향입니다. 조금이라도 기체를 잘못 몰았다가는 전혀 엉뚱한 목적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 때문에 이 영화들이 더욱 자유롭고 대담해 보이나 봅니다.
라퓨타인들은 라퓨타를 땅에서 띄우고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요? 배를 띄우고 육지와 멀어지는 용감한 탐사꾼의 설렘을 가졌을까요? 영화에서 라퓨타는 발달한 기술로 땅을 지배하는 무력의 성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닿기 어려운 하늘에 폭풍 장막을 두르고 넘쳐나는 호화로움에 행복했을까요? 저더러 땅과 닿지 않는 새로운 땅에 살라고 하면 저는 그냥 무섭고 외로울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사람과 살아야 합니다. 눈높이를 맞추고 육성으로 대화해야 합니다. 숨겨진 성이나 숨겨진 행성은 그다지 풍수지리가 좋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꼭 땅에서 독립하고 자취를 시작한 학생 같달까요. 떵떵거리던 시절이 끝나고 쇠퇴해 버린 라퓨타는 또 한켠으로는 독거노인분이 오랜만의 외출 전에 정리한 깔끔한 방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에 더하여 다양한 인상들이 따라옵니다. 육지와 떨어진 독립된 땅이 섬이라면, 라퓨타도 개념적으로 섬입니다. 깔끔하지만 문을 열자마자 오랫동안 쌓인 먼지가 들고일어나는 작은 돌섬입니다. 그래서 라퓨타의 기억에는 어딘가 오묘한 향이 따라오나 봅니다.
아 참, 괜찮으시다면 재미있게 읽은 책을 알려주세요. 저는 친구가 소개해 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추천받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누군가의 애정 작품을 읽는 것은 그 사람을 슬쩍 엿보는 기분이라 재미있습니다.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제일 좋아했어요. 제 친구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각자가 어떤 사람인지 뚜렷이 구분된다는 것을 확인하면 입가에 미소가 걸립니다.
[ 패턴은 같은 것들의 반복 ]
패턴은 같은 것들의 반복입니다. 반복은 리듬감을 만듭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된다면 무엇이 반복되는지와는 상관없는 모호한 공통점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신발의 반복이 아니라, 신발 - 농구공 - 캔맥주 - 마우스의 반복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일정한 간격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네 개의 사물을 별개의 사물들이 아닌 하나의 군집으로 받아들입니다.
오히려, 차이점은 패턴을 더 패턴답게 합니다. 패턴이 재미있기 위해서는 조금의 차이점이 있어야 합니다. 차이점이 없다면 화장실 타일처럼 재미없는 패턴이 됩니다. 저도 매일 아침마다 앉아서 화장실 타일을 쳐다보지만, 어떻게 생겼는지는 아무런 기억이 없습니다. 반면 패턴 속 차이점은 패턴을 주의 깊게 보도록 만듭니다. 서로 다른 굽의 높이, 발등을 잡아주는 신발 끈의 위치, 신발 종류의 다양성. 하지만 하나의 열은 같은 색을 가집니다. 하나의 행은 점진적인 색의 진행을 규칙으로 가집니다. 패턴은 구성 요소 간 공통점과 차이점이 조화와 더불어 자율성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사라진 신발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패턴이 정말 많습니다. 패턴으로 의도되지 않아도 패턴입니다. 한 달가량 패턴이라는 말에 꽂혀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패턴을 찾아다닌 적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그 당시 모았던 패턴들입니다. 무엇이 공통점이고 무엇이 차이점인지 관찰하는 소소한 재미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모든 것이 패턴일지도 모릅니다. 요즈음 저는 가로수와 가로등이 좋습니다. 가로수는 특히 낮에, 가로등은 특히 밤에 좋습니다.
[ 옹졸한 야자수, 파파야를 달라 ! ]
솟대를 아시나요. 솟대는 마을 입구에 세운 긴 장대입니다.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며 볍씨를 넣은 주머니를 묶어 세우거나, 마을의 수호신을 상징해 천상계를 오가는 전령조를 올려 세우기도, 과거 급제를 축하하기 위해 푸른 용을 붙인 주홍 장대를 세우기도 했답니다. 유래는 삼한 시대의 소도로 보는 것이 유력하나 우리 민족만이 가지던 풍습은 아니었다고 해요. 아시아 북방계 민족들이라면 보통 추워지는 계절 남쪽으로 떠났다가 따뜻해지면 북으로 돌아오는 철새들을 신성시했다고 합니다. 북방계에서는 셀쿠프족, 돌간족, 야쿠트족, 에벵크족, 나나이족, 오로치족 등이 솟대에 오리나 기러기를 얹었다고 해요.
만약 남방계에도 소도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기다란 장대 끝에 옹졸하고 귀여운 야자수가 하나 달리지 않았을까요? 달달한 파파야를 모시는 부족이었다면, 하늘에 달린 야자수를 쳐다보면서 '달달한 파파야를 달라 !' 라고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북방계의 돌간족은 천상계로 영적인 여행을 떠나는 샤만을 인도할 기러기나 오리들을 나뭇가지에 올려놨겠지만, 진짜 행복을 찾는 남방의 민족들은 천상의 파파야를 인도할 하늘야자수를 신봉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저는 어떤 쪽의 사람이냐 물으면 남방의 사람인데, 속으로는 혼자 파파야 대신 망고를 가져달라 빌었을 게 분명합니다. 비교하기 어렵지만 황도복숭아도 좋습니다.
[ 맥아와 홉으로 만든 파도 ]
물보다 맥주를 더 많이 마시는 것 같습니다. 제가 마시는 액체의 종류를 나열한다고 하면 차례로, 커피 (지분:80%) > 맥주 (지분:15%) > 침과 물 (지분:5%)입니다. 특히 저녁의 액체섭취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측면에서 맥주는 생활필수품이 맞습니다. 저는 알코올의존성이 아니라 체내 수분 함유량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맛있고 설레는 궁극의 방법을 찾았을 뿐입니다.
최근에는 맥주 거품도 다양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개인적으로 최고라고 꼽는 맥주는 YEBISU 맥주입니다. 라거 맥주인데, 생맥주로 시켜 첫 입을 마셔보면 즉시, 거품이 꽤 달달한데, 하고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그 맛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음식도 제쳐두고 홀짝거리며 거품을 아껴 마셨습니다. 오 분쯤 지나니 컵에 맥아와 홉으로 만든 파도 자국만 선명하고 배는 잔뜩 불러서 음식을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커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는 아침마다 핸드드립으로 커피를 내려마셨습니다. 가을과 겨울에는 따뜻하게 내리고, 봄과 여름에는 얼음 위에 내렸습니다. 초기 얼음의 양, 추가할 얼음의 양, 추출에 사용할 물의 양을 정확한 비율로 재고 경건한 마음으로 물을 따르면 끝입니다. 물론 자세하게는, 사용하는 콩과 그라인딩된 알의 굵기, 추출하는 데 쓰는 물의 온도와 추출 방법에 따라서 맛이 다양하게 바뀝니다. 사람에 따라서 의도적으로 추출을 덜 시켜 일본 스타일의 깔끔함과 산미가 있는 커피를 내릴 수도 있고, 추출을 최대한 시켜서 떫은맛이 느껴지기 직전의 강력한 쓴맛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에게 맞는 알맹이의 크기와 물 온도의 조합, 푸어링 방법을 찾는 것은 푸어링 커피의 색다른 재미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네스프레소의 간편함에 빠졌습니다. 누가 팩스를 씁니까? 요즘 세상에는 핸드폰으로도 스캔이 됩니다. 스캔을 하고 바로 이메일로 보내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메일로 보내드렸다고 전화도 걸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네스프레소는 간편하면서도 믿음직한 맛을 보장합니다. 다른 맛을 원한다면 다른 색의 네스프레소를 한 줄 사면됩니다. 아이스로 먹고 싶다면 얼음을 깔고 내리면 됩니다. 고작 1분 30초밖에 걸리지 않아요. 핸드드립에 비하면 굉장히 똑똑한 방식입니다.
그러다가 그저께, 전에 일했던 학원 원장님께서 홍보용으로 받은 커피 샘플 콩을 받았습니다. 또 몇 달 방치되다가 버려지겠지 생각하고 찬장에 넣으려 했는데, 무시하기에는 향이 너무나 좋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모카포트를 꺼냈습니다. 모카포트는 충분히 간편하고, 향 또한 풍부합니다. 향이 어찌나 풍부한지, 마시다가 재채기를 두 번 했습니다.
보통은 하나의 사진으로 하나의 주제를 뽑아낼 때, 조금이라도 주제의식을 갖자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하지만 이번 주제는 그럴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아요. 책상 위에 어젯밤 먹은 맥주와 아침용 커피가 같이 올라와 있어서 썼습니다. 글이라는 게 결국 보이는 대로 쓰이는 것 아니겠어요.
[ 밖에 있는데 문 닫아서 서운한 집주인 ]
요즈음 날이 참 좋습니다. 이런 날이면 괜히 카메라를 사고 싶어 져 당근마켓을 뒤적거립니다. 만약 카메라를 산다고 해도 두 달만 있으면 좋은 계절은 가고 더운 계절만 남겠죠. 그런 날씨에 가죽 스트랩을 목에 거는 정말 커다란 용기입니다. 저는 핸드폰 카메라에 만족합니다.
환절기 감기를 한 번 앓았습니다. 독감이나 코로나였을지도 모릅니다. 일주일을 끙끙 앓고 나니 왠지 체력이 반으로 줄어버린 기분이 듭니다. 주변 친구들은 규칙적인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일어나서 조깅을 한다던지 헬스장을 간다던지 하는 식입니다. 친구들이 대단해 보이는 게 꼭 제가 나이를 먹고 있다는 의미 같아서 싫습니다. 하긴 어젯밤에 뭔가를 두둑이 먹고 자니까 소화가 안 돼서 잠을 잘 못 잤더라고요. 아무튼 모두들 무병장수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