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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큐베리 Mar 17. 2024

새 신발 신고 만난 내 남자.

결혼 17주년 맞이 회상

사랑에 굶주렸던 아이답게 성장 과정에서 만났던 남자들도 여러 명이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나쁜 남자. 이별하면서 훗날 결혼은 자기랑 해야 한다고 했던 이상한 남자.

헤어지자는 말에 죽어버리겠다며 자해를 하고, 달려오는 차에 뛰어들었던 남자.

‘그 남자들과 결혼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 거무스름한 그림자가 떠오른다.

그들이 별로였다는 게 아니라 상처받고 자란 아이인 나와 가정을 이루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다.

어쨌든 나를 스쳐갔던 남자들 중  대학생일 때 만난 우리 집 남자가 남편이 되었다.


사촌오빠 친구로 나와 처음 만났던 남편.

남편은 그저 내가 친구의 사촌동생으로 마냥 귀여운 여동생이었다고 한다.

친한 친구의 사촌동생인 나를 세심하게 챙겨주었고, 나는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기대어 보기도 하고,

같은 학교라는 이유로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난 자연스럽게 남편을 좋아하게 되었고, 내가 먼저 사랑을 고백하게 되었다.

어디서 그런 당돌함이 나왔던 건지 지금 생각해 보니 나란 여자는 원래 겁이 없었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난 고민도 하고, 망설여보기도 했지만 힘들게 고백을 했다.

이 남자 왈 친구의 사촌동생을 만날 수는 없다면서 절대 안 된다고 하며 날 멀리 하려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촌오빠는 우리의 만남을 강하게 반대하며 사랑의 훼방꾼이 되어있었다.

반대가 심해질수록 내 마음은 더욱 커졌고, 이런 내 마음을 결국 남편이 받아들여줬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은 오빠의 여자 친구로 지내보고 싶었는데...

내 마음을 빼앗아 갔던 사건이 해수욕장으로 대학교 MT를 다녀오던 날에 일어났다.

선배들과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을 찍고 난 후 누군가가 나를 바닷물에 빠트렸다.

옷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신발을 신은 채로 물에 빠져서 무척이나 찝찝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자친구였던 오빠에게 전화를 했다.

“오빠. 신발이 흠뻑 젖은 거라 집에 가서 신발을 바꿔 신고 나와야 할 것 같아.”

“알겠어. 기다릴 테니 집에 잘 다녀와”

집에 다녀오라고 말했던 오빠는 새 신발을 준비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하게 산 것 같은 삼선 슬리퍼도 아니고, 하늘색 파스텔 톤의 운동화였다.

물에 젖은 내 운동화를 가방에 넣어주고, 새 신발을 꺼내어 주던 오빠를 보면서

그동안 느끼지 못한 특별함이 느껴졌다. 꽃이나 향수를 선물 받았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도 앞서 생각해서 준비해 준 남자에게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매일 같이 소란스러운 상황에 버려지고,

엄마의 부재와 함께 예측 불가한 상황 속에서 살았던 스무 살 이전의 내 삶에서 느끼지 못한 색다른 안정감이었다.

물에 젖어 찍찍 소리와 함께 냄새가 나는 오래된 신발을 벗으며 생각했다.

‘이 남자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아.

나를 잘 알아주는 이 남자라면...

내 인생이 지금보다 낫지 않을까?’

남편은 나보다 5살이나 많은 사람이었기에 여자를 다루기 위한 끼 부리는 남자의 행동이라

했을지라도 나의 필요를 먼저 알고 채워준 남편에게 처음으로 느낀 안정감이었다.

그렇다. 나는 어떠한 사랑 고백보다도 삶을 채우는 안정감을 원했던 것 같다.

처음 느낀 안정감에 사랑이 더해지면서 난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사랑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를 사랑으로 물들여줬던 남자와의 17년 결혼생활.

2년의 연애기간까지 더하면 20년 가까이 이 남자와 함께 하고 있다.

결혼기념일이라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는 사이가 아니라, 

온 가족 둘러앉아 삼겹살 구워 먹는 격식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내 사랑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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