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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땡큐베리 Mar 29. 2024

희망고문 시댁살이

보통의 삶에 대한 기다림

인생의 가장 큰 관문인 결혼도 했으니 이제

불행은 나와 상관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가슴 떨리게 행복한 일까지는 아니어도 보통의 삶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출산을 한 달쯤 앞두었을 때 남편의 발령 소식이 들렸다.

이제 겨우 시부모님과 눈 맞추는 게 어색하지 않은데...

발령 이라니 나는 어쩌란 말인가?

사실 우리의 첫 보금자리는 30평대 아파트 한쪽 귀퉁이의 남편 방이었다.

이것을 한 단어로 말하면 모두가 손을 흔들어 댄다는 ‘시댁살이’이다.

커다란 이불 가방에 그 계절에 입을 옷 몇 가지를 챙겨 와 나의 신혼생활이 시작되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엄마가 되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시댁살이쯤이야. 문제없지’ 생각했다.

아무리 무서운 시댁이라 한들 나를 사랑하는 남편이 함께 있을 건데... 무엇이 무섭겠는가?


무섭진 않았다.

다만 조금 불편했을 뿐이다.

시부모님이 주무시는 안방과 우리 신혼방 사이에 화장실이 있었고,

임신 막달에는 돌아서면 화장실에 가고 싶고, 누군가 화장실에 들어가면 괜스레 불안했다.

변기에 앉았을 때 고요한 적막을 깨는 물소리는

내 몸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고 싶어 수도꼭지를 빠르게 돌렸다.

아들만 키운 집이었어도 청소용 테이프를 즐겨 사용하셨던 어머님은 시도 때도 없이

빠지는 나의 긴 머리카락을 보며 탈모를 걱정하셨다.

걱정하실 어머님을 위해(?) 집안에서는 머리를 풀어헤치지 않았다.

고무줄은 항상 내 머리를 잘 잡고 있었고, 미처 잡히지 못한 머리카락은 내 손에 잡혀

흔적 없이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어쨌든 시댁살이에 조금씩 내 몸이 적응해 갈 때쯤엔 다음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의 발령은 이제 막 엄마가 된 기쁨을 누리고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친정으로 돌아갈까?’ 한동안 망설였다.

어떤 사회적 기준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는지, 쉽사리 친정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K장녀로 자라왔기에 세상의 시선도 누구보다 중요했다.

“결혼하고, 애까지 낳았다는데... 남편도 없나 봐. 친정집에 와서 혼자 산대”

시댁살이 하는 며느리는 되더라도 소박맞은 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 불편하면 어때. 내가 잘하면 되지! 내가 잘하자. 할 수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으로 외쳤다.     


친정집은 주택이라 추운데, 아파트에서 지내면 따뜻하게 살 수 있으니 좋지.

분가해서 살았으면 서먹서먹했을 텐데...

같이 살면서 자주 보면 더 좋을 거야.

주말부부는 3대가 덕을 쌓아야만 할 수 있다는데, 나는 이렇게 빨리하니 얼마나 좋아.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좀 지나고 나면 다시 함께 살 수 있겠지.

아이 돌잔치 하고 나면, 아빠랑 매일 같이 잘 수 있을 거야.

아이가 쫑알쫑알 말할 때쯤이면,

그때는 함께 할 수 있겠지.

아빠랑 아이랑 손  잡고 아침마다 어린이집 갈 날이 곧 올 거라 생각했다.

남편은 큰 아이가 7살이 될 때까지 돌아올 수 없었다.

나는 그저 혼자만의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우리가 함께 살게 될 날을 기다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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