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상의 모든 반짝이가 나를 거부했다.
16살 겨울이었다.
한 살 터울의 언니가 집으로 돌아온 날 길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가 '반짝'하고 빛났다. 하나. 둘. 셋. 세 개의 빛이었다. 엄마의 분노 버튼을 누를 것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귀를 뚫고, 그것도 세 개나 뚫고, 집에 들어온 언니의 패기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은 그다음이었다. 내게 '반짝'은 그렇게 다가왔다. 언니의 귀가 다 아물 때까지 엄마의 한숨은 계속됐고 나의 기다림도 시작됐다.
한 달 정도 지나 엄마의 숨이 고른 틈을 놓치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금은방에 방문했다. 오 마이 갓. 사방팔방으로 반짝이는 공간에 발을 들인 순간 후회가 밀려왔다. 제정신으로 들어왔을 리가 없다. 무서운데 지금이라도 다음에 오겠다고 말해볼까. 이것이 나의 자유의지 일리 없었다. 아무렇지 않게 두 개도 아닌 세 개를 뚫고 와서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책을 보고 친구들과 놀고 학교를 가던 언니 덕분에 나도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장착한 상태였다. 누군가의 용기 있는 선택은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나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던 영역의 저 밑바닥 용기까지 끄집어 내주는 게 분명하다.
라떼는 5천 원에서 만원 정도의 귀걸이를 한 쌍 사면 그 자리에서 구입한 귀걸이의 끝을 뾰족하게 사선으로 자른 후 귓불에 점을 찍고 맨 손으로 한방에 찔러 넣는 방식으로 귀를 뚫었다. 적어도 천만 명의 귀가 그렇게 무작위로 뚫려 나갔을 즈음에 황당하게도 불법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이런 방식으로 귀를 뚫어주는 가게가 하나둘 사라지면서 스스로 진정한 라떼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고로 요즘 젊은이들은 귀를 어디서 어떻게 뚫는 건지 궁금해진다. 혹시 뚫기 전에 알레르기 반응이 있는지 검사도 하고 뚫고 나서 2일 간격으로 드레싱 처방을 받는 건 아닐까. 이런 서비스가 있었다면 나의 반짝이는 사정도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당시 서비스라곤 뚜둑 우지끈 소리와 함께 통통한 귓불을 통과한 쇳덩이의 앞뒤로 상처연고를 두툼하게 발라주는 것뿐이었다. 욱신욱신한 바운스를 동반한 구멍 난 내 귓불은 붉게 달아오르고 팅팅 불고 간지러운 염증을 동반했다. 노란 고름을 짜내면서 막히고 뚫리고 막히고 뚫리기를 반복했지만 다시 숨이 가빠질 엄마에게 치료를 부탁할 순 없었다.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3일이면 낫는다며 뚫기전용 귀걸이를 빼고 난 후 사용 할 나의 첫 귀걸이까지 추천해주신 친절한 사장님께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환불이 불가능 한 일주일이 흐른 뒤였다. 하지만 사장님의 추천귀걸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쓰다듬으며 이 고통을 기꺼이 버텨낼 수 있었으니 한편으론 감사를 전해야할지도.
지난한 시간 이후 ‘반짝반짝 빛나는 귀걸이를 사면서 탕진 잼을 누리고 있습니다.’라는 아름다운 결말은 일어나지 않았다. 새로운 귀걸이를 할 때마다 귀를 뚫었던 첫날처럼 붉고 노란 바운스가 요동쳤다. 금제품에는 알레르기가 없었지만 고작 16살에게 금귀걸이란 중년의 아줌마를 연상케 했으므로 손이 가지 않았다. 차라리 수술용 매스의 소재로 모든 피부에 알레르기가 없다고 알려진 써지컬 피어싱이 차선책이었으나, 피어싱 귀걸이는 예쁜 모양선택의 폭이 좁았다. 이런저런 이유들로 모든 귀걸이가 내 귓불을 스치듯 지나갔다. 귀걸이를 교체할때마다 애써 뚫어놓은 구멍이 막혀서 다시 뚫는 곳을 찾아가고 다시 곪고 다시 치료하는 여정이 반복됐다. 결국 귀를 뚫을 용도로 구매하는 제일 저렴한 라인의 큐빅 귀걸이를 벗어나지 못한 채 나는 반짝이는 생을 포기했다.
아니, 내가 포기하기 이전에
세상의 모든 반짝이들이 나를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