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무사 귀환한 날. 온통 하얀 눈폭탄으로 두텁게 덮인 집과 2층 집 거실에서 행복한 감금생활을 하고 있는 딸아이가 나를 맞이했다.
"눈이 다리까지 쌓여서 학교 안 가게 해달라고 했는데 진짜로 그렇게 되었어. 엄마~"
상기된 딸아이의 목소리가 입가에 미소를 불러왔다.
우리 집이 있는 곳이 전국에서 눈이 가장 많이 내렸다고 한다. 나도 이렇듯 많은 거대한 눈을 본 것은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다. 내가 없는 사이 쉴 틈 없이 눈이 내리고 또 내렸나 보다. 무려 47.5 센티까지. 상상 이상이다.
처음으로 여행 떠난 엄마 없이 등교하기가 쉽지 않던 차에 눈이 이리도 많이 내려서 아이가 원하는 대로 휴교령이 내렸다. 덕분에 나도 제주에서 발뻣고 편히 눕고, 즐길 수 있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와 딸아이의 마음이 통했나 보다.
아무튼 대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눈이 쌓였다. 문이 열리지 않아 겨우 여행가방을 쑤셔 넣고 몸을 밀어붙였다. 발이 푹푹 빠지는데 무릎까지 눈이 올라와 있었다. 걷기도 힘들어 겨우겨우 발을 옮겨 디디며 마당으로 들어서니 남편이 데크와 계단에 길을 만들어 놓은 게 보였다. 힘들게 눈을 치운 거 같아 내심 고마웠다.
어제 뉴스(출처. 뉴시스)
나 없는 동안 사료금식을 했던 꽃순이와 백설이가 내가 들어서 앉으니 식사를 시작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밥을 굶는다며 걱정이 태산인 딸아이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는데, 아닌 게 아니라 내가 곁에 앉으니 그제야 사료에 입을 갖다 대는 꽃순이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진짜로 왜 밥을 안 먹은 거야? 나 없어도 잘 먹어야지. 왜 그랬어?"
"엄마, 혼내줘야 해. 사료를 하나도 안 먹었어. 엄마가 오니까 이제 먹잖아."
꽃순이와 백설이가 번갈아가면서 밥 두 그릇을 비웠다. 늘 같이 침대에서 자는 딸아이가 있는데도 내가 없다고 밥을 안 먹는 꽃순이를 어떡한담. 도대체 왜 그러는지. 나는 반려견 꽃순이와 백설이가 식사를 다 마칠 때까지 곁을 지켜줬다.
금요일에는 한국어 수업이 있는 날인데, 이런 날에도 수업을 해야 할지 살짝 고민을 했다. 그냥 휴강을 할까 하던 차에 민주 씨와 아리 씨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수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내일은 아리 씨와 미미 씨가 중극으로 돌아가는 날이라 오늘은 무척이나 바쁠 거라 생각했는데, 가기 전날까지도 공부를 하고 싶다니.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이 많이 내렸지만 수업을 강행했다.
"우리 고향에는 이렇게 눈이 많이 와요. 눈이 와서 너무 좋아요."
고향 생각이 나는지 쿤밍과 청도, 길림성의 고향 얘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중국 그녀들이 아름다웠다.
중국에 가 있는 샤샤 씨와 내일 떠나는 짐을 싸는 미미 씨는 수업에 참석하지 못했다. 지난 토요일에 미리 미미 씨와 남자친구, 아리 씨와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송별의 시간을 가졌는데도 아쉬움이 몰려왔다. 미미 씨 남자친구가 점심을 사주고, 아리 씨는 내게 향수를 건넸다. 나는 작은 선물로 향긋한 핸드크림과 내가 쓴 '김치가 바라본 카레세상 인디아'책에 사인과 덕담을 담아 그녀들의 손에 들려주었다.
"중국에서 한국어 공부 열심히 해서 꼭 읽어보세요. 내가 쓴 책이니까요."
아리 씨는 단감을 말려서 곶감을 만들어 마지막 시간까지 선물을 챙겨 왔다. 나는 따뜻한 차와 함께 오븐에 고구마를 구워 수업이 끝날 무렵에 나눠 먹었다. 떠나기 전에 문법과 어휘 하나라도 더 배워가라고 조금 늦게 수업이 끝나고 문을 나서는데...
아리 씨가 내게 봉투를 건넸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수고비예요."
"어머나, 왜 그래요?"
"선생님, 생선회 드세요. 꼭!!"
수업 시간에 내가 생선회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걸 기억하고, 날 생각해 주는 그녀.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느라 애를 먹었다.
집으로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다시 내게 제안을 했다.
"선생님, 우리 점심 같이 먹어요."
난 그녀들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 헤어짐의 무거움을 덜고 싶었다. 내내 슬퍼했던 나보다도 더 슬퍼하는 그녀. 정이 많은 나보다도 더 정이 많은 그녀들. 중국 여성들이다. 그녀들의 마음이 곱고 예쁘다.
훠거를 먹자고 했다. 또 회를 먹자고 했다. 내가 샤브샤브를 좋아하고 회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흘려보내지 않는 그녀들. 기어코 나를 데리고 갔다.
눈이 얼마나 많이 내렸는지 점심시간에 훠거집도 횟집도 문이 닫혀있었다.
"우리 자장면 먹어요. 난 자장면 좋아해요."
나의 제안으로 중국집 홍류로 향했다. 고구마를 먹어서 많이 먹을 수 없었지만 우리는 탕수육과 함께 또 한 번의 송별만찬을 나눴다. 밖에는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쌓인 눈 위에 또 눈이 쌓일 기세였다.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눈을 맞으며 길을 잠시 걷다가 작별인사를 했다. 서로 안아주며 온기를 남겼다. 오래오래 기억될 사랑의 온기를.
집으로 오기 전 얼른 하나로마트에 들렀다. 일단 먹거리가 좀 필요했고, 눈이 오니 주전부리용 과자 꼬깔콘과 마가렛을 사기 위해서였다. 분주하게 장을 보는데 계란코너 앞에서 매화 씨를 만났다. 이런 우연은 반가움에 희열을 불러오곤 한다. 마침 내일이 귀화시험을 보러 가는데, 눈이 와서 얼굴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나와 두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하고 준비했으니 좋은 결과가 있었으면 좋겠다.
"85점 꼭 받아요. 파이팅!!"
"아유, 모르겠어요."
매화 씨가 갑자기 달걀 한 판을 내게 건넸다. 나는 있다고 집에 진짜로 있다고 겨우겨우 사양을 하고 손에 든 달걀을 내려놓게 했다.
'중국 여성들은 왜 이리도 정이 많은 거야.
정 많은 나보다도 더 많아. 못 말리겠어. 정말.
그녀들은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울리는 걸까?
영국에서 만났던 메잉, 샤, 보웬 그 셋을 나는 지금도 있지 못하는데. 여기서도 중국 여성들이 내 마음을 훔치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 쌓인 집에 돌아와 두 시간에 걸쳐 눈을 치웠다. 손은 눈을 치우고 마음은 그녀들을 생각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옷이 젖고 머리카락까지 젖었다.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따뜻한 온수에 몸을 씻고, 딸아이와 남편의 요기를 챙겨주고는 전기장판으로 데워진 이불속에서 몸을 녹이며 이 글을 쓴다. 그녀들을 생각하고, 오늘 하루에 감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