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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샨띠정 Dec 22. 2023

중년이 되어 다시 읽는 제인 오스틴의 '설득'

성찰

언제 까지든 소녀로, 아니 젊디 젊은 청년으로만 남을 줄로 알았던 그 싱그런 날들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이젠 중년이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면 노년이 되어있는 날도 머지않았으리라.

사춘기 소녀 시절, 그때는 로맨스 소설도 추리 소설도 문학도 다 좋았다. 애정하던 작가들과 책들을 꼽으라면 단연 영국 여류작가들이지 않을까? 샬롯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 자매의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을 빼놓을 수 없겠고,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과 '이성과 감성', '엠마'와 '설득'은 결코 제외할 수 없다. '맨스필드 파크'는 영국에서 거주할 때 가장 늦게 접했던 제인 오스틴의 소설인데, 이야기의 줄거리에 빠져서 나중에 영화와 BBC 드라마도 찾아본 적이 있을 만큼 좋아했다. 그 당시도 30대였으니 아직 젊은 시절이지 않았던가.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영국의 여류작가들의 뒤를 쫓고자 그녀들이 살던 집을 찾아 그들의 고향을 방문하곤 했다. 영국 중부 요크셔에 있는 하워드 언덕의 브론테 자매가  살며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를 썼던 그녀들의 집을 찾아 먼 길을 여행했다.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 '설득'의 배경이기도 하며, 실제로 그녀가 살았던 바스에 가서 제인 오스틴 가족이 머물며 글을 쓰던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 그때의 18세기 분위기를 그대로 고스란히 느껴보려 애를 썼으며, 제인이 걸었음직한 바스의 거리를 걸어보기도 했다.


영국의 중고 서점에 들르면, 오래전 작은 글씨로 인쇄된 제인 오스틴과 영국 작가들의 문학책을 구입했다. 다 읽지 못한다 해도 언젠가 누군가가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 어쩌면 그녀를 기억해 주고 싶은 마음에서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책들은 영국에서 한국으로 왔고, 다시 인도로 건너갔다가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와 우리 북카페 책꽂이에 꽂혀 있다. 주인 따라 물 건너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이리저리 파도 따라 흘러 다니다 이곳에 마침내 정착한 것이다. 그렇듯 사랑하고 좋아하던 그녀의 책이다.


북카페 독서모임에서 꼭 한 번쯤은 제인 오스틴의 책을 함께 읽고 마음과 생각을 나눠보고 싶어서 12월 도서로 제안했다. 다행히 모두 동의하고 감사하게도 같이 마음을 같이 하여 함께 읽기 시작한 책이 '설득'이다.  제인 오스틴의 유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설득'은 제인 오스틴이 41세로 갑자기 생을 마감한 후에 출판된 그녀의 마지막 책이며, 가장 완벽한 책이기도 하다.

그동안 제인 오스틴의 책들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로 수차례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야말로 유명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열연을 했던 작품들이다. 내가 아는 영국 배우 콜린 퍼스나 휴 그랜트, 톰 매커보이, 이와 맥그리거, 귀네스 팰트로, 앤 해서웨이, 키에라 나이틀리, 케이트 윈슬렛, 엠마 톰슨 등 너무나 많은 배우들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주인공을 맡아 그들을 사실감 있게 표현했다. 최근에 만들어진 넷플릭스의 '설득'은 보지 않는 게 원작을 읽은 이들의 감성을 깨뜨리지 않을 거라는 조언까지 나올 정도이며, 어떤 이는 제인 오스틴이 관속에서 벌떡 일어날 지경이라고 하니 나는 일찌감치 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바 있다.

제인 오스틴의 설득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니까 수십 년 전부터 제인 오스틴의 책을 좋아했는데, 여전히 그녀의 책이 좋다. 산천도 강산도 변한 지금 중년의 시간에 읽은 '설득'은 어떨지 궁금했다. 나 스스로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할지 궁금하여 호기심을 안고 책을 꼼꼼히 읽어나갔다.

과거의 나와 지금 현재의 나는 어떻게 변해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같은 감성으로 책을 읽어나갈까?

내면의 나 자신과 마주하며 첫 장을 넘겼다.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처음 대목을 읽어나가는 데는 여전히 집중력이 필요했다. 전체적인 개요를 머릿속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에 기억했던 것들은 다 지워버리고 새롭게 출발했다. 제인 오스틴의 필력은 그야말로 천재적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은 인내력을 가지고 출발한 초반 부분을 지나고 나서는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펼친 '설득'에 풍덩 빠져버리고는 헤어 나오지 못했다. 다음 날 일정을 위해서(다행히 일요일이었지만, 콰이어를 위해 일찍 교회에 가야만 했으며, 예배 후에는 성탄절 칸타타 연습도 있고, 그다음엔 북카페에서 심리학 강의도 있는 아주 길고 긴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찍 자야만 했지만, 머릿속은 점점 맑아지며 눈은 총총 해졌다. 결국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고 말았다. 뒷부분은 아쉽지만 다음날 저녁에 읽기로 접어놓은 채로.

설득의 등장 인물도

여전히 나는 제인 오스틴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 중년이 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녀의 책에 정신을 뺏겨버린 것이다. 옅은 보라색 색연필을 들고 밑줄을 그으며 읽다가 연필심이 닳아져 다시 분홍 색연필로 바꿨다. 그리고 다시 연필깎이를 찾아 색연필을 깎아내고 밑줄 긋기를 할 수 있었다. 책 속의 세밀하고 정교한 문장들,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와 글로 써 내려간 문체와 어휘를 붙잡아보려고 밑줄을 그리고 또 그렸다. 가끔은 별표와 하트 표시까지도 함께.


오래전 나는 여주인공 앤과 프레더릭 웬트워스에게 집중해 있었다. 오직 그들의 말과 감정,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와 생각, 그들만의 표현과 됨됨이에 눈길을 주며 거두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롤 모델이자 이상형이며, 나의 목표가 되었다. 내가 살아가면서 지표로 삼고 쫓아가야 할 어떤 존재가 있었다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 여자 주인공들이었다. 그때의 나는 그들처럼 도덕적이며, 귀품 있고, 사려 깊으며, 솔직하면서 인간적이고, 마음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바랐다. 반면에 주변에 있는 다른 인물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며, 나와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그저 타인에 불과했다. 나와 관련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의 소설 속 여주인공, 겉으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석 같은 사람이며 누군가가 그의 가치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며 사랑해 주는, 누구보다도 사리 분별을 잘하며 지혜롭고 당찬 여성이 아니었던가?


그 후로 세월이 흘러 나는 중년이 되었고, 그녀의 책에 있던 그 여주인공들은 여전히 젊은 모습 그대로 나를 만나고 있었다. 오직 나만 나이가 들어버린 것이다. 이제 나는 언제까지나 풋풋할 것만 같은 시절을 다 보내고 돌아와 다시 그녀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으며, 어떻게 성장해 왔을까? 과연 나는 내가 그리도 꿈꾸며 바라던 그 모습에 도달은 한 것일까? 아직도 그 가능성이 남아 있기나 할까? 지금도 그 여주인공들을 바라보며 나의 롤 모델로 삼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주인공 앤을 설득했고, 지금도 설득하려 애쓰는 레이디 러셀과 같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욕심과 불만으로 가득 차서 입에 투정을 달고 살며, 질투심이 가득한 메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언젠가는 병들고 약한 스미스 부인과 같은 모습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외모와 허영심에 가득하며, 가정의 경제적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체면과 사회적 계급만을 중요시하는 앤의 아버지 월터 엘리엇 준남작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한들 어찌하리. 비록 지금의 내 모습이 여주인공과 닮아있지 않다 한들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모습의 어떤 부분은 앤과 닮아있을 수도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희망도 버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 자신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비록 내가 생각했던 대로의 아름답고 찬란한 날들이 되지 못하고, 주인공으로 살지 못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내 인생은 소중하며,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것이라는 것을.

나만의 색채로 나의 인생을 그려나가기로 마음을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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