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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서연 Jul 14. 2024

"너 페미니스트야?"

TCK 여대생이 한국와서 참 많이 들은 그 말.

"너는 페미니스트 아니지? 한국 페미니즘은 이상해, 괜히 한국에서 이상한거 배우지 마"

한국에 들어와서 대외활동에서 만난 남자 대학생들과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항상 듣던 말이다.

그리고 주로 "남자 모두가 다 그런건 아니다" "남자를 다 잠재적 가해자로 보면 안 된다" "미투 그거 여자 한명이 작정하면 남자 하나 그냥 나락으로 보내는거 아니냐" 등의 말들이 추가 되었다.


한국 남성들의 페미니즘, 여성 혐오(misogyny)는 이제 해외 언론에서도 보도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전에 여성과 남성들이 각자 살면서 '불편한 점'들을 나열한 한국어 짤이 있었다. 여성으로 살면서 '불편한 점'에는 '데이트 폭력', '자취 혼자 하기 위험함'이 있었고 남자들은 '여름에 긴 바지 입고 출근해야 함', '무거운거 들어줘야 함' 등이 있었다. 댓글은 '이게 맞지, 각자 사는거는 똑같이 힘드니까 남녀 갈라놓고 불평불만하지 마라' 등의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여성으로서 살면서 '불편한 점'들은 여성의 '목숨'을 위협하는 일들이다.

최근에 남자 의대생이 헤어지자고 한 전 여자친구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페미니즘을 싫어하니까 이 사건에 대해서 분노를 하지 않는가? 그건 또 아니다. 그대신 사회는 고학력자인 '의대생'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에 집중한다. 남자의 분노로 여자 한명의 인생을 앗아갔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 여자는 여자여서 죽은게 아니라 그냥 운이 없어서 죽은 것 같다는 반응이다.

조두순의 경우에도 사회는 '성인이 '아이'를 성폭력했다는 사실에 집중한다. 물리적으로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 성인 '남자'가 '여아'를 성폭했다는 사실에 분노하지 않는다.


한국 페미니즘이 '이상'한 이유

그렇다. 한국 페미니즘은 과격하다.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자신의 이야기가 들렸으면 하는 기본적이 욕구가 있다. 정의가 필요한 시점에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 사람은 과격한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한국 페미니즘은 질타를 받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이래도 죽어가는 여성들이 안 보이냐는 절규로 들린다. 과격한, 저급한 표현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의 혀를 깨물어 정당방위를 한 여성에게 그 남성과 결혼할 생각이 없냐고 묻는 법 체계 안에서, 물리적 힘이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묻지마살인에서 쉬운 타겟이 되는 사회에서 제정신으로 살기란 '이상'한 것이다.


'중립'이라고 하면 지성인일까?

선택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을 하는 것이다. 중립을 선택하는 것도 무언가를 선택한 것이다. 맞고 있는 애와 때린 애 사이에서 '나는 부모니까 중립을 선택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때린 애 편을 드는 것과도 같다. 나는 그래서 '중립'을 선택한다는 사람들이 참 밉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중립'이라는 안전한 선택지를 선택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아이고 잘했다' 칭찬을 받는 모습이 밉다. 무책임하다.


이제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기 시작하는 나이대가 되니 주변 지인들로부터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여성을 타겟으로 한 범죄 이야기가 주변에서 흔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당신 주변에 없다면 이런 사람이 없다면 축하한다. 하지만 당신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 귀에 이런 일들이 안 들린다면 그것은 당신이 피해자편이 되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평소에 "너도 페미니스트 뭐 그런거니?"라고 말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교생 시절, 오리엔테이션 첫날, 교생 담당 선생님이 교생들에게 젠더 관련 발언은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셨다. "요즘에 워낙 이슈다 보니까요"가 이유였다. 이렇게 미래는 더욱더 암울해졌다. 그 사회 문제의 뿌리를 찾기 위해서 그 나라의 학교를 뜯어보면 대부분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주입식 한국 교육이 건강한 토론 문화의 기회를 단절시켰고 모든 지적은 공격이 되었고 비판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날,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왔다. 화가 났다. 내가 만약 이런 사회에서 딸을 낳게 된다면 20년 뒤, 내 딸이 나를 원망할 것 같았다. 나의 할머니의 할머니, 그 사람들의 할머니, 나를 지나갔던 모든 여자들, 그리고 미래의 후손들까지, 그들의 한이 고스란히 내 몸에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무식한 사람들과 같은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았다. 이것을 설명해주고 싶지 않았다. 이것을 아무리 말해도 들을 수 없는 사람들과 살고 싶지 않았다.

"I tried to be a joyful feminist, but I was very angry." - Agnès Varda

프랑스 영화 감독이 했던 말이다. 나의 자매들이 죽고 있다는 것을 방긋방긋 인형처럼 웃으면서 말할 수가 없다. 데이트 폭력으로 죽어가는 여성들이, 가정폭력으로 매일이 고문인 여성들이, 직장에서의 솜방망이 대처로 성희롱/성폭력 때문에 생존권을 위협 받으며 일상을 버텨내는 여성들이, 어떻게 그들의 절규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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