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온 도

by 연유

독서 모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카페 가운데에 있던 그랜드 피아노에서 빠르고 경쾌한 선율이 울려 퍼졌다. 순간 100만 볼트에 감전된 것처럼 전율이 흘렀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앙상했던 마음속 가지에서 꽃망울이 맺혔다. 그곳에서 작은 속삭임이 전해왔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숨바꼭질, 술래잡기 같은 놀이를 했다. 그런데 오후 4시쯤이면 나를 빼고 친구들은 음악학원에 갔다. 학교에서 다시 만날 걸 기약하며, 혼자 남아 딱지를 치거나 팽이를 돌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언제부터였을까? 친구들은 바이엘, 체르니 같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럴 때마다 강한 소외감을 느꼈다. 학교 음악 시간에 선생님께서는 음악학원에 다녀 본 사람은 손을 들라고 말했다. 친구들의 오른손은 자신 있게 하늘로 솟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후 선생님은 모두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수업을 진행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쌓여갔다.

‘라시도가 왜 ABC일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들어 질문했는데, 옆자리 친구의 핀잔이 날아왔다.

“바보야. 너는 그것도 모르냐?”

그날 이후 음악 시간은 뒤집힌 사분음표가 되었다. 낮은음자리표의 음계처럼 고개를 숙이고 꾸벅꾸벅 책상만 보는 학생이 되었다.


엄마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어느 날, 기회다 싶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친구들처럼 음악학원 다녀보면 안 될까?”

“음악은 무슨 음악이야. 서예학원 등록해 놨으니까 내일부터 붓글씨 배워”

외할아버지는 사자소학을 배워야 아이가 올곧게 자란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나는 피아노가 아닌 서예를 배우게 되었다. 학원은 상아색 타일로 마감된 4층 건물 꼭대기에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내 무릎까지 오는 높은 계단을 올랐다. 마주한 갈색 현판과 모자이크 유리문. 흐릿한 공간의 틈을 비집고 나오는 등유 난로 냄새. 졸고 있는 원장님과 커피를 마시며 모여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불편한 시선. 빠르게 인사하고 쌓여있는 신문지를 한 움큼 챙겨 책상 귀퉁이에 앉아 붓글씨 연습했다. 단순하고 지루한 작업. 언제부터였을까? 원장님처럼 꾸벅꾸벅 조는 게 일과가 되었다. 그러다 먹물이 옷에 튀기는 날이면 엄마에게 꾸중을 듣는 건 덤이었다. 평소에 혼나는 건 괜찮았는데, 서예학원 때문에 혼날 때는 왜 그렇게 서러웠을까? 그때마다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마음속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던 꽃망울이 피지 못하고 또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쌓였다.


불러온 추억을 성급하게 밀어 넣었다. 당장 피아노가 배우고 싶어졌다. 집 앞에 있는 학원으로 찾아갔다. 두 팔 벌려 환대할 거란 생각과 달리 어렵다며 난색을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며 반추했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학원을 운영하는데, 성인이 다니면 부모님이 걱정할 거란 생각. 지금 마음의 추동이 사그라들기 전에, 디지털 피아노를 사서 독학하기로 했다. 나진상가에서 입문용 전자피아노를 찾다가, 흰색 피아노에 홀렸다. 나에게는 과분했지만, 무광 화이트에 마음을 빼앗겼다. ‘예쁘면 자주 앉아서 연습하지 않을까?’라는 자기 합리화. 결국 스탠드와 페달, 스피커까지 설치하고 눌러본 상아색 건반. ‘잘할 수 있을까?’ 마음속 걱정처럼 묵직하게 움직였다.

피아노는 흰건반 52개 검은건반 36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4번째 가운데 도인 가온 도(C4)를 중심으로, 높은음 자리와 낮은음 자리로 나눠진다. 높은음은 오른손으로 선율을 낮은음은 왼손으로 반주를 담당한다. 유아기 때부터 겪은 정서적 학대로 인해, 나의 가온 도를 잃어버렸다. 엄마 의견에 거부하지 못하고 점점 낮은음으로 내려갔다. 조금이라도 높은음으로 가려고 하면, 그의 매서운 눈빛과 다그치는 행동이 튀어나왔다. 이후 반주의 삶이 이어졌다. 스펙을 쌓아 취업하고, 돈을 벌어 투자해서 자산을 불리는 과정.


혼자 부르는 노래보다 여러 사람이 부르면 조화로운 소리가 나는 것처럼. 멜로디를 받쳐주거나 보충하고 강조하는 반주. 이제는 오른손으로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으로. 색깔과 향기를 더한 멜로디를 연주해야지. 가끔은 높아지고 낮아질 때도, 느려지거나 빨라질 때도 있겠지만. 가온 도를 중심으로 지금까지 쌓은 반주에 걸맞은 멜로디를 섞어 나만의 곡을 연주해야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