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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 굴의 여우

by 연유

“선생님이 반주해 줄게요. 멜로디를 연주해 보세요.”

손가락 독립 연습을 할 때였다. 지루한 반복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내 마음을 어떻게 아셨는지 도미파솔 도미파솔 뚜벅이는 멜로디에 화음이 맞물렸다. 대서양 위에서 표류하던 돛단배에, 순풍이 불어온 것처럼. 느려지고 무거웠던 손가락이 경쾌하게 리듬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는 것처럼.


“다음에 보드게임(할리갈리) 가져가서 하자!”

“그거 알아? 나 태어나서 처음 해봐.”

“뭘 자꾸 안 해보고 사는 거야. 우리랑 다 해봐.”

운수 좋은 날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초대해서 홈파티 해보기. 내 생일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파티 해보기> 두 가지 버킷리스트를 한 번에 달성했던 날. 친목 모임을 통해 인연이 된 동생들이 홈파티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시간을 조율했고 1월 4일 토요일로 정해졌다. 그날은 내 생일이어서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내색하지 않았다. 동생들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닭가슴살과 양배추만 다듬던 주방에서 음식 냄새가 퍼졌다. 프라이팬에서는 닭갈비가 구워졌고, 궁중 팬에서는 어묵탕이 끓고, 오븐에서는 콘치즈가 지글지글 익어갔다. 함께 마시고 싶어서 산 귀한 술과, 맛있는 음식. 좋아하는 음악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지금까지 이어졌던 반주의 삶에서, 뚝뚝 끊어졌지만 도, 레, 미, 멜로디를 하나씩 눌렀다.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고 차게 메말라가던 뿌리에 온기가 전해진 것 같았다. 다음번에는 카니발을 빌려서 경주월드에 가서 놀이기구를 타자는 약속. 내가 이사를 하면 집들이 겸 홈파티를 한 번 더 하자는 이야기를 하며 즐거움이 농익어 갔다.


청소년기는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관심 있는지, 자아를 탐색해야 하는 시기. 나는 멜로디가 아닌 반주의 삶을 살았다. 집에 쌀과 반찬 국이 떨어지는 걸 신경 써야 했고, 냉장고에든 내가 사둔 식재료를 어떻게 조리할지 고민해야 했다. 나의 취향과 관심 흥미보다 일용할 양식이 급했으니까. 부모님의 반주 위에서 건반을 더듬어 자신의 멜로디를 누르는 친구들 사이에서. 엄마를 위한 반주를 누르며, 친구들의 멜로디를 부러워하는 게 전부였다. 오롯이 돈과 먹고사는 것에 급급했던 삶. 공부는 장학금을 위해서. 취미와 대외 활동은 취업을 위해서. 엄마를 위한 안정적인 반주를 위해서 삶의 초점이 맞춰졌다. 그렇게 20년이 지났다. 집에 쌀과 김치가 떨어진 적 없고, 냉장고에 계절과일이 항상 채워져 있었다. 더 이상 2년마다 임대인과 계약갱신으로 눈치싸움을 하지 않고 살게 되었다. 아버지를 독립시키고 반주의 삶이 끝났다. 드디어 나도 고등학교 친구들처럼 더듬더듬 멜로디를 누르던 때였다. 그가 초인종을 누르기 전까지.


“엄마야. 안에 있는 거 알아”

그는 토끼 굴 밖 여우처럼 앞발을 들이밀었다. 그대로 얼어붙어 숨도 쉬지 못했다

"내가 많이 아파서 음식을 얼마 못했어. 네가 좋아하는 떡국이랑 녹두전 산적했으니까 먹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음식을 만들었다는 걸까?‘

20분간 이어지는 일방적인 언어폭력. 얼음 조각이 된 채 빨리 돌아가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제 끝났나 싶었는데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말을 이었다.

"절대 버리지 말고 네가 다 먹어."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은 일방적인 통보. 10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은 그의 태도에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이틀간 불도 켜지 않고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삼 일째 되는 날 그가 놓고 간 음식을 쓰레기통에 버리며 생각했다.

'이사 가야겠다.'


드라마 더 글로리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은 엄마 정미희(박지아)를 피하고자 살지 않는 원룸에 전입신고를 하고 유령처럼 살아간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전셋집 보증금을 지키기 위한 확정일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사한 집도 대출받아야 해서 불가능했다. 공동 현관 번호도 없는 낡고 만만해 보이는 주공아파트. 그는 제집인 양 편하게 앞발과 코를 들이밀었다. 심리적인 벽을 두기 위해. 크고 웅장한 아파트로 이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는 무관심으로 대응할 것이다. "연락하지 마세요. 찾아오지 마세요."라는 부정적인 관심조차 그는 반갑게 생각하고, 틈을 비집고 나에게 들어오려고 할 것이니까.


불안이 밀려올 땐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보며 왼손 반주, 오른손 멜로디를 맞춘다. 잡념은 건반에 흡수되어 고민은 안개처럼 흩어진다. 오른손으로 좋아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으로, 색깔과 향기를 섞은 멜로디를 더해야지. 누구에게도 멜로디를 빼앗기지 않고, 내가 쌓아온 반주에 걸맞은 멜로디를 섞어 나만의 곡을 연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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