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후회할 것 같은가?
결과가 내 예상대로일지, 아닐지는 선택의 순간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결과이든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 자체를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돌아가는 14시 버스를 타기 위해 야심찬 계획을 수립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센트럴 산장에서 view point까지는 약 3시간 20분 정도 거리였으나, 새벽 산행이고 나는 걷는 속도가 느린 편이라 넉넉하게 4시간 30분으로 잡았다. 또한 왕복 20km라는 거리에 무릎상태를 예측하기 어려워 한 시간 정도 버퍼도 포함시켰다.
2시 센트럴 출발
4시 칠레노 도착 - 2시간 소요
4시 30분 칠레노 출발
7시 viewpoint 도착 - 2시간 30분 소요
7시 30분 viewpoint 하산
9시 30분 칠레노 도착 - 2시간 소요
10시 칠레노 출발
12시 30분 - 센트럴 도착 - 2시간 30분 소요
야심찬 계획과 달리 새벽 1시 50분 알람을 듣는 내 몸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이 피곤해 알람을 끈 채 다시 잠들어 버렸다. 한 시간 뒤 나에게 마지막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한 시간 버퍼를 둔 덕에 지금 출발하여 쉼 없이 산행하면 목표(토레스 델 파이네 삼봉을 보는 것)를 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3일간의 내 산행을 돌이켜보면 무릎의 통증으로 쉼 없이 산행하는 게 쉽지 않아 성공을 100% 담보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단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성공하지 못할 것이란 핑계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다.
이 생각이 들자 잠이 깨끗이 달아났다. 서둘러 몽생이를 깨우고 짐을 챙겨 새벽 산행을 시작했다. 그 시간이 새벽 3시였다.
센트럴에서도 일출을 보기 위해 이르게 출발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들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헤드랜턴에 의지하여 단 둘이 걸어야 했다. 전날 이곳에서 퓨마를 봤다는 이야기를 들어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다. 더욱이 밤하늘 아름다운 별들만큼 발 밑에는 돌덩이가 수없이 수놓아져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넘어질 만큼 험한 돌길에 별을 감상할 여유도 없었다. 퓨마에, 돌길에 긴장해서 인지 유난히도 힘든 산행이었다.
10걸음 걷고, 쉬고, 다시 10걸음 걷고를 반복하며 마음 한편이 복잡해졌다. 늦잠으로 3시에 출발하며 “후회 없이 내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간다.” 는 마음가짐이었지만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남미까지 와서 토레스 델 파이네 삼봉을 꼭 보고 싶은 마음 역시 여전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충돌하는 두 마음에 더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고행의 길을 걷길 한 시간쯤 지나자 드디어 험한 돌길이 끝나고 흙길이 나타났다. 양 옆으로는 깎아질 듯한 골짜기였지만 돌길이 아님에 힘이 절로 났다. 다시 한번 삼봉을 보겠다는 마음이 더 크게 일었다. 더욱이 해가 나기 시작하며 시야가 확보되자 속도도 조금씩 빨라졌다.
그렇게 새벽 5시 30분 칠레노 산장에 도착했다.
칠레노에서 잠시 휴식 후 삼봉을 보기 위해 다시 출발했다. 이쯤 해가 어느 정도 떠올랐다. 사실 새벽 산행을 감행한 이유는 삼봉에서 일출을 보기 위함 이었다. 불타는 고구마라 불리는 절경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늦어진 출발과 우리의 걸음 속도로는 이미 일출은 포기해야 했다.
일출이 물 건너가서인지 나의 여행파트너 몽생이의 몸 컨디션도 갑작스레 급락했다. 지친 몽생이는 나의 “그만할까?” 한 마디면 바로 하산할 기세였다. 평상시에는 항상 내가 먼저 체력적 한계에 부딪혀 포기를 외치는 편이기에 나의 콜사인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나는 내가 갈 수 있는 최선의 지점까지 가겠다는 의지가 더 강해져 있었다. 돌이켜 보면 오기였던 거 같다. 나 역시 우리가 토레스 델 파이네 삼봉을 볼 수 있는 viewpoint까지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왕지사 갈 데까지는 가본다는 오기가 들었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지칠 대로 지친 몽생이에게 “삼봉의 봉우리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지점”까지만 가자고 꼬시기 시작했다. 전체를 보진 못해도 좀 만 더 걸어가면 지금보다 풍경이 좋을 거라며 그를 다독이고 100m, 200m 조금씩 나아갔다. 그러나 산은 멀리서 볼 때 가장 잘 보이는 법인지 조금씩 산속을 파고들수록 보일 듯 말 듯하던 봉우리는 점점 사라져 갔다. 산속을 파고들수록 나무는 울창해져 갔고, 어제 온 비가 채 마르지 않아 축축한 흙길을 걸어야 했다.
그러나 모든 고난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삼봉의 끄트머리가 우리를 반겨주기 시작했다. 어두운 숲 속에 있는 우리와 달리 저 멀리 삼봉우리가 보이는 지점은 마치 천국과 같이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어두움이 가득했던 몽생이의 몸 컨디션에도 "화장실의 발견"이라는 한 줄기 햇살이 비추었다. 다행히 화장실에 다녀온 후 그는 멀쩡해졌고^^ 저 멀리 view point를 향해 쏜살같이 걸어갈 수 있었다.
삼봉이 보이는 지점에 다다르자 일출을 보고 하산하는 수많은 사람을 마주쳤다. 길이 좁고 경사가 가팔라서 마주 오는 사람을 피해 걷는 게 힘들기도 했지만, 내려오는 사람마다 우리에게 고지가 코앞이라고 응원해 준 덕에 힘이 났다.
거의 다 왔어! 힘내!
물론 고지가 코 앞이란 말은 (착한) 거짓말이었다. 돌무더기 길을 한 시간을 꼬박 걸어야 했다.
그렇게 아침 8시 30분 토레스 델 파이네 view point에 도착했다. 새벽 3시에 출발하여 꼬박 5시간 30분이 걸렸다.
기대하던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대신 파란 하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일출을 보러 온 사람은 모두 내려가 그곳에는 정말 우리 둘만이 존재했다. 감격했다. 이 풍경도 감격스러웠지만, 무엇보다 오늘 새벽 3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란 핑계로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것이다.”라는 명언(?)과 함께 졸음을 이겨내고 발을 내디딘 나 자신에 그리고 마침내 성공해 낸 내 자신에 취했다.
최근 몇 년간 이 정도의 성취감을 맛본 적이 있던가?
일에서 성취는 늘 나에겐 100%의 기쁨은 아니었다. “조금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끊임없는 회고, 자잘한 실수에 대한 후회, “이 정도는 누구나 하는 거지. 너무 좋아할 필요 없어”라는 자기 검열까지 매번 기쁨을 갉아먹는 감정이 공존했다. 그러나 트레킹에서는 그 어떤 회고, 후회, 자기 검열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 몸이 증명하는 오롯한 성취와 순도 100%의 기쁨만이 있었다. 그 기쁨이 주는 엔도르핀이란 너무도 선명하고 짜릿해서 나 자신이 아름답고 대견할 따름이었다. 앞으로 무엇이든 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지어는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때의 짜릿함이 생생하다.
토레스 델 파이네를 마주하며 아껴왔던 마지막 믹스커피를 한 잔 탔다. 그리고 다짐했다. 앞으로 인생을 살며 깊은 좌절을 마주하는 순간이 온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산을 오르리라. 내 몸이 전하는 온전한 성취와 기쁨이 있다면 그 좌절에서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도파민이 제대로 터졌는지, 하산길은 어느 때보다 몸이 가벼웠다. 9시에서 하산을 시작했고, 13시에 센트럴 산장에 도착했으니 딱 4시간이 소요되었다. 웰컴센터에서 버스를 타고 푸에르토 나탈레스에 도착하자, 3박 4일 만에 속세와 다시 연결되었다.
토레스 델 파이네에서 3박 4일 간 55km를 걸으며 몸의 움직임이 가져오는 삶의 변화를 느꼈다. 매일 걷는 행위는 자연스레 규칙적인 식사, 배변활동, 숙면로 이어졌다.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며, 오롯이 내 두 발이 걸을 수 있는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란 원초적이었지만 행복했다. 나는 내 예상보다 강하고 건강한 사람이라는 자신감도 얻었다.
한편 그간 내 몸이 얼마나 억압받고 있었는지도 느껴져 많은 반성이 들었다. 사무직으로 심지어는 재택으로 일하는 나에게 움직임이란 가뭄에 콩 나듯 있었고, 심지어는 헬스 PT와 같이 돈을 내야만 겨우 있는 특별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어깨가 아프고,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픈 여러 이유는 결국 내가 그만큼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자명해졌다.
실은 아픈 것보다도 일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이 나에게는 더 심각한 이슈였다. 사무직으로 정신노동을 하는 나는 때때로 머릿속이 뿌였다는 느낌을 받는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일을 하며 머릿속 수많은 정보들이 구조화되지 않은 채 꽉 차 있는 듯한 기분이다. 미팅에서 상호 간 추상적인 이야기를 내뱉을 때면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이런 기분으로 퇴근을 하면 퇴근해서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다. 이 기분을 지우고자 유튜브를 켠다. 휙휙 바뀌는 화면에 멍해지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된다. 그렇게 2~3시간 유튜브를 보고는 도파민에 뇌가 절여져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멍하니 몇 시간을 보내다 잠자리에 든다. 다음날 아침도 피곤은 해소되지 않고 머릿속이 뿌연 느낌은 더 심해진다.
이 악순환을 해결하는 방법은 단 하나이다. 아주 짧게라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다. 토레스 델 파이네 W트레킹이 나에게 알려준 내 몸의 잠재력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내 몸은 내 생각보다 강하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의식적으로 몸을 움직여야 행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