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를 읽고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이 촌스럽게 보였던 시절이 있다. 아니 에르노가 그러했듯 내가 사는 세계의 사람들의 생각까지 우스워 보였다(71)
나는 아버지에게 느끼는 소속감과 연민, 슬픔, 부끄러움 그 모든 감정을 정리해낼 요량이 없어서, 그냥 아버지를 미워한다고 말했다. 미워하기 때문에 아버지에 대해 더는 생각하지 않는 거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유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것은 촌스럽다고 여겼다. 아버지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게 성장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다. 그래서 졸렬한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를 자꾸 생각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이 더는 촌스럽거나, 유아적이거나,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미워한다 말하며 아버지를 판에 박힌 사람으로 치부한 내가 부끄러울 뿐이다. 사실 나는 여전히 아버지에 대해 더 말하고 싶고, 더 생각하고 싶다.
화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을 기점으로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 화자가 태어나기 직전부터 화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이후까지 아버지의 삶을 천천히 회고한다. 그녀는 아버지에 대해 온전히 기억해내지 못하고, 아버지 옆을 맴돌았던 스스로에 대해 기억할 뿐이다. 소설의 프랑스어 원제목은 "남자의 자리"가 아니라 "자리"다. 그 "자리"는 아버지의 자리가 아닌 아버지 옆에 섰던 화자의 자리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화자는 이런 것을 기억해낸다. 처음 함께 도서관에 갔을 때 아버지가 어떤 책을 찾느냐는 사서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던 것, 결혼식 날 아버지가 울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그리고 아버지는 점점 자신의 삶에 만족했던 것.
적어도 나를 먹여 살린다는 것에 행복해했다.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71p
우리 아버지는 15년을 호평동의 같은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카페의 사장님이자 부모님이 물려준 건물의 관리자다. 아버지의 형은 35년을 심장내과 전문의로 일했는데, 아버지는 그의 형처럼 살고 싶어서 10년 넘게 의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다. 여러 번 낙방했고, 급기야 그는 자신을 실패자라 불렀다.
아버지는 여유롭게 지냈다. 새벽에 카페 문을 열고, 크게 노래를 틀고, 카페를 청소했다. 그럼 어머니는 9시 무렵 카페에 내려왔고,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집에서 야구 경기를 보거나, 배구 경기를 보거나, 각종 뉴스를 보거나, 쇼트트랙 경기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 내가 본가에 방문할 때면 커다란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를 껐다. "왔냐?" 말하며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마음으로 자리를 비켜주는지 알 수 없다. 아버지는 나와 말을 시작하는 것이 두려운 사람 같다. 나는 집에서 필요한 것을 빠르게 챙겨 어머니가 있는 카페로 향한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내 몸에 조금만 이상이 생겨도 나를 서울대학병원에 데려갔다. 15살 무렵 내 이마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나를 서울대학병원 피부과에 데려갔고, 작은 연고를 받아 병원을 걸어 나왔다. 우리는 한 개인 카페에서 초코빙수를 먹었는데, 그 카페에 내가 아끼던 호피무늬 귀마개를 벗어두고 왔다. 나는 아버지에게 차를 돌려달라고 말했다. 그것을 기필코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차를 돌리는 건 어렵겠다고 말했다. 나는 잠자코 알겠다고 말했다. 우리가 또 함께 서울대학병원에 갈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아버지와 내가 함께 병원에 간 적은 없다. 나는 더는 아프지 않았고, 아버지 앞에서 누구보다 바쁜 사람인 척 굴었다.
아버지는 호평동에서 지낸 15년의 세월이 고작 10시간 정도로 생각된다고 했다. 기억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치열할 것도 없었던 한낮의 시간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나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냐고 물었다. 내가 이렇게 자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아버지는 네가 자란 건 네가 자란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에게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직업이 없는 삶은 아버지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말을 스스로 했다. 한편 아버지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글을 쓰다가 자신을 실패자라 여길까 봐 두려워했다.
아래에 있던 세계의 추억을 마치 저급한 취향의 어떤 것처럼 잊게 하려고 애쓰는 세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욕망 앞에 무릎을 꿇었던 것이다.
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65p
어머니는 카페를 색다르게 꾸며보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색다른 디자인을 위해서는 어머니의 취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취향이 없다고 했다. 취향 같은 게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남들 보기에 다 예뻐 보이게, 깔끔해 보이게 꾸미고 싶다고 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럼 돈이 필요하다고 일러주었다. 어머니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돈이 없으니 조명에 붙은 벌레를 제거하지도 못한 채 이 카페를 이렇게 운영 중인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취향이 없지만, 누구보다 트렌디한 사람이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 배민 배달 쿠폰을 보내주신다. 마켓컬리 배송을 우리 집으로 시켜주신다. 그럼 나는 어머니에게 마켓컬리 배송이 오면 우리 집에 너무 많은 쓰레기가 쌓여 죄책감이 생긴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그래, 너는 신식이구나, 말한다. 그 어떤 박탈감도 없이.
어머니는 아무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종종 남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정말 싫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남자의 자리>는 그녀에 대한 두 번째 인상이다. <남자의 자리>는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어떤 상인지 모르겠으나 대단한 상이 아닐가 생각한다. 그녀의 이 작품이 참 좋기 때문이다.
문학은 인생이 아니에요. 문학은 인생의 불투명함을 밝히는 것이거나 혹은 밝혀야만 하는 것이죠.
진정한 장소, 아니 에르노.
아니 에르노는 문학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그렇다 문학은 불투명한 인생을 밝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모른다. 쓰지 않으면 더는 존재하지 않는 불투명한 삶을 구하기 위해.
1800년대 프랑스가 그 배경이기 때문인지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겹쳐 떠오르는 작품이었다. 화자의 감상을 철저히 배제한 이 작품이 이토록 슬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죽음 이후 상황이라는 가정 때문일까, 그의 아버지만을 오래 뒤쫓는 서술의 문제 때문일까. 도저히 배제될 수 없는 화자의 시선 때문일까. 그 무엇 때문이든 사회과학 도서가 아닌 문학 도서로서, 한 인간에 대한 질적 연구가 아닌 소설로서 가치 있다.
무엇보다 다른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불투명함을 밝혀내는 소설.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도록 나를 채찍질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