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살 May 25. 2022

무뼈 워딩을 쓰세요

우리는 일상적으로 뼈 있는 말을 한다. 내 열등감을 감추고 싶을 때, 상대가 밉살스러워 견딜 수 없을 때, 내가 원하는 걸 전략적으로 쟁취하기 위해서.

뼈 있는 말은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

대신 뼈 있는 말은 나를 보호한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철저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날카롭고, 단호한 방식으로.


얼마 전 나의 애인 O는 몇 달 뒤 프랑스로 떠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일이 틀어지지 않는다면 말이야”

O와 나는 일 년 넘게 연애했다. 우리는 일 년간 각자의 감정에 솔직하기로 약속했고, 실천해왔다.

그날 O의 말을 듣고 내가 느낀 감정은 애석하게도 분노였다. 하지만 나는 연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속 좁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기로 했다.


분노를 품고 집에 돌아오니, 못된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었다.

O에게 상처를 주고 싶었다. 악독한 말을 내뱉고 싶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O를 만날 때마다 뼈 있는 말만 골라 하기 시작했다.


O: 일 년 전 여름이 참 좋았는데

나: 그렇지, 그때는 네가 날 참 좋아했는데. 돌아가고 싶어라…


O: 유진아, 우리는 꼭 파주에 가서 함께 살자

나: 글쎄 그때까지 우리가 함께할지는 모를 일이지.


뼈 있는 말들이 쌓이니 O는 견디지 못하고 화를 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나는 알고 있었다. O가 잘못한 것은 꿈을 찾아 떠나는 것뿐. 나의 잘못은 그런 O에게 화가 난다는 것뿐. 이런 나의 감정은 이기적이다. 그래서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말을 해, 뭐라도 말을 해”

O가 말했다. 하지만 나는 뼈 있는 말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악마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안다. O에게 하고 싶은 말은 “가지 마!” 단 한마디뿐이라는 것을. 

말한다고 달라질 일은 없다. 다만 무뼈 워딩의 힘이란 실로 놀라워서 O의 떠나는 발목을 붙잡을 수도 있겠다.

나는 희망을 품고 O에게 말했다.

“가지 마”

진짜 놀라운 일은 지금부터 시작됐다. 분노에 가득 찼던 내 마음이 땡볕의 얼음처럼 스르르 녹아 버렸다. 이상하리만큼 평온했다. 뼈를 걷어낸 민낯의 언어는 초라하긴커녕 반짝였다. O는 나의 진심을 온전하게 받아주었다. O는 진심을 소중히 다뤄주는 사람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나는 비로소 웃으며 O의 손을 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우리는 결국 서로의 옆으로 돌아오겠지, 그렇게 믿었기 때문이다.

무뼈 워딩은 고속도로 같이 뻥 뚫린 길을 열어준다. 저어기로 말을 던져. 그럼 분명 마음이 통할 거야. 나는 힘껏 말을 던진다. 드디어 저 먼 곳의 누군가 내 말을 받는다. 먼 곳의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무뼈 워딩의 힘은 실로 놀랍다.  


그러니 오늘도 다짐한다.

무뼈 워딩을 쓰기로.

나도 모르는 사이, 놀라운 일이 벌어질 테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