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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yong Feb 02. 2016

자고 나면 나아질 테니까

서투른 시 읽기 #7 이생진 <잠을 자야>


잠을 자야 / 이생진


잠을 자야

먼 거리도 좁아지는 거다

잠을 자야

물에 빠진 척척한 운명을

건질 수 있는 거다

잠을 자야

너와 내가 이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다      



웹툰 <진눈깨비 소년>에서  시를 보았다.

분명치 않은 고민으로 가득한 주인공에게

바텐더는 바로 잠이 들만한 독주를 몰래 건넨다.

"뭔가에 생각이 고여있을 땐

일단 잠을 푹 자고 나서

가벼운 머리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을 거라고  사료됨."라는 멋들어진 메모와 함께.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을 테지만 어쩐지 해결된 듯한 느낌,

깨어나기 전과는 분명히 달라진 세계가 눈에 띈다.


앙리 루소의 '잠자는 집시' 그림이 떠오른다.

사막을 맨발로 유랑하는 집시 소녀의 삶은 고단했을 것이다.

소녀에게서 여독이, 그 지친 흔적이 느껴진다.

잠은 이를 껴안는다.

낮에 맹수를 만난다면 그것은 위험이겠지만 밤의 맹수는 온순한 환상이다.

악기와 물병, 밤과 별, 그리고 사자가 소녀의 단조로운 잠을 지킨다.

깊은 잠에 빠지면 꿈은 이 정도의 단조로운 환상으로 충분하다.

또다시 고단해질 내일을 위하여 오늘은 자두어야 한다.

이 밤에 잠을 자두어야 '척척한 운명을 건질 수 있는 거다'


잠이 가지는 함축은 무한하다.

인생의 3분의 1을 잠자는 데 쓴다는 식상한 상식은 접어두더라도,

꿈이 지니고 있는 여러 해석과 분리시킨다고 해도

'잠'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읽어보면 떠오르는 감상이 묘하면서 아늑하다.   


여동생의 "몇 밤 자고 올 거야?"라는 물음이 가진 천진함을 좋아한다.

밤은 견디기 힘들다. 잠을 자면 편해진다.

잠을 자면 시간은 어느 때보다도 성실하게 흐르고

우리가 만날 시간이 성큼 가까워진다.

그래, 잠을 자야 '먼 거리가 좁아지는 거다'


잠은 동물의 기초적인 생리 현상이므로 당연한 것이지만

이 당연한 것이 지니는 효용이 낯설고 특별하다.

버티기 힘든 생을 위탁하고 탈출할 수 있다는 건 큰 위안이다.  

눈을 감는 행위는 빛을 차단시키고 어둠을 향해,

어쩌면 우주의 세계와 맞닿으러 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니, 너무 거창해지지 않더라도  잠자는 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아늑한 기분이 펼쳐진다.

잠을 자는 이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도 그 순간 '이 세상을 빠져나갈 수 있는 거다'


'잠'과 관련된 사진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뒤지다 보니 잠자고 있는 인물 사진이 많다.

대부분 술 취해 자고 있는 친구 사진이고, 포근히 자고 있는 아이 사진이나 후임 사진도 있다.

꽤 좋아하는 사진, 내 사진도 있다.


2013, 여름, 신촌 시바펍


3년 전, 학기가 끝난 날, 아마 연애로 고민하던 시기였나.

저녁에는 문화인류학 수업 뒤풀이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지. 문화인류학과 사람들이 자주 간다는 지하 펍에 갔고, 어떤 누나는 나한테 화장을 해줬고, 누가 사온 베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누구 생일이었던가, 물담배가 있길래 어떻게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해보자고는 안 했고, 했나? 하지는 않았고. 그리고 잤다.


몽롱한 기분 속에서, 어쩐지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좋은 사람들 속에서 잠이 왔다.

행복한 피로감과 만족감이 뒤섞인 상태가 되자 눈이 감겼다.


잠을 자는 주체는 스스로를 볼 수가 없다.

성실하지 못했던 학기에 대한 뒷감당, 기대처럼 되지 않았던 관계의 성가심,

여러 감정의 불순물이 가라앉지 않았어도 그 날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사실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이렇게도 아늑하게 잠을 자고 있는 얼굴을 보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은 내일을 꿈꾸고 있었다고 믿을  수밖에.

사진을 찍어준 선배는 나에게 이걸 알려주려고 했던 걸까.

물론 그냥 놀리고 싶었겠지. 좀 귀여웠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이 사진 한 장이 보여주는 분위기 덕에 그 날을 편하게 추억할 수 있다.


앞으로 잠에 대한 사진을 찍어야지.

본인은 모르는 그 평온한 시간을 보여줘야지.

기억할 수 없는 그 시간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먼 거리가 좁아진 풍경, 척척한 운명을 건져낸 표정, 이 세상을 빠져나간 그 모습을 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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