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른 시 읽기 #6 황인찬 <희지의 세계>
저녁에는 양들을 이끌고 돌아가야 한다
희지는 목양견 미주를 부르고
목양견 미주는 양들을 이끌고 목장으로 돌아간다
이러한 생활도 오래되었다
무사히 양들이 돌아온 것을 보면
희지는 만족스럽다
기도를 올리고
짧게 사랑을 나눈 뒤
희지는 저녁을 먹는다
초원의 고요가 초원의 어둠을 두드릴 때마다
양들은 아무 일 없어도 메메메 운다
풍경이 흔들리는 밤이 올 때
목양견 미주는 희지의 하얀 배 위에 머리를 누인다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익힌 콩과 말린 고기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이것이 희지의 세계다
희지는 혼자 산다
황인찬 시인의 시는 쉽다. 시를 이해하는 게 쉽다는 건 아니다. 읽기 쉽게 쓴다. 쉽게 읽힌다. 관념적인 언어가 없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시의 언어라기 보다는 그냥 ‘말’이다. 그의 언어는 익숙히 들어온 일상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제 두 사람의 온기로 따뜻해진 침대에 잠깐만 더 말하며 몸을 묻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오늘은 이미 첫 끼를 먹었다 밀린 빨래를 하고 밖으로 나온 것이 오랜만의 일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자주 걸을까요 너는 아직도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나는 너에게 대답을 하지 않고 이것이 얼마나 오래 계속된 일인지 우리는 모른다”고도 한다.
예술이든, 언론이든, 문학이든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프레이밍을 제시한다. 그들이 무엇을 표현한다는 것은 사실 굉장히 의미심장한 얘기다. “이거 엄청 중요한 거야!” 라고 소리를 꽥 내지르는 행위. 이 광활하고 공허한 세계의 특정 한 부분을 가리키며 다른 모든 부분과 구분시키는 틀을 제공한다는 것.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 가치를 결정짓는 것. 이러한 관점을 바탕으로 황인찬 시인의 ‘말’을 보게 되면 사뭇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근현대로 이어온 시의 세계에서는 부단히 시대와 현실을 담고, 기성작가들은 그것이 보다 높은, 숭고한 정신의 세계로 이어지기를 바라온 듯하다. 지금까지의 시대는 그러했다. 그러한 시대였다. 지금 세대가 감히 상상만 할 수 있는 그런 현실이었으리라. 우리 세대는 그런 현실을 텍스트로 배웠지만 살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평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지금의 세대는? 황인찬 시인은 일상의 목소리로 답한다. 지금의 시대는 큰 흐트러짐 없이 일상을 살아가게 주조된 단조로움이 지배한다. 세상이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는 전쟁도 없고, 혁명도 없다. 누가 가린 것인지, 보지 않으려는 것인지, 볼 여력이 없는 것인지, 설마 모두 다 인건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간다. 크고 작은 사건들은 끊이지 않지만 일상을 뒤흔드는 일은 없이, 흐트러짐 없이 흘러간다. 우리의 일반적인 자화상은 일상을 깨부술 필요도 느끼지 못한 채, 어쩌면 무시한 채 시간을 채워가는 모습으로 합의된다.
물론 각자의 정체성은 이에 구속되지 않는다. 본질을 일상의 하염없는 반복으로 결정짓는 이는 없다. 사회에 뿌리박고 피곤한 하루하루를 견디는 이의 자아에는 언젠가 여행을 떠나고야 말겠다는 염원이 있고, 그의 자화상에서 자신의 모습은 세상을 떠도는 방랑자의 모습이지 도시에 갇힌 샐러리맨의 모습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이 괴리에 대한 해소가 바람직한 자아상에서 결정적이다. 일상과 이상의 분리에 대한 우리의 익숙한 해답은 이상을 찾아 언젠가 해방되고야 말겠다는 결단에 있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꿈을 쫓아갔다는 샐러리맨들의 일화는 개인적인 혁명의 도모로 이상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비현실적이지만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기대감을 심어준다.
그렇지만 그런 결단이 얼마나 소수를 위한 것인지, 그 또한 이제는 안다. 부푼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을 동반한다. 그마저 대부분의 이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야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상상할 수는 있어도 감히 기대해서는 안 되는, 소망마저 위축된 세대가 되었다. -목가적인 풍경 속에서 평화로운 목동인 듯한 희지는 사실 '혼자 산다'. 희지의 세계는 언뜻 이상에 가까운 풍경을 그리지만 '혼자산다'는 마지막 구절이 불편한 현실의 자화상을 환기시킨다.- 그런 우리에게 같은 ‘우리’인 황인찬 시인은 ‘말’을 건넨다. 호기로운 결단의 언어가 아닌, 숭고한 사상의 언어가 아닌, 일상에 뿌리박고 있는 그 단조롭고 간결한 ‘말’을 건넨다.
물론 일상에 대한 재평가는 신선한 관점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상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된 세대에게 일상에 다가선다는 것은 필연적이고 동시에 새로운 것이다. 우리가 ‘혁명이니, 사상이니’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대가 말할 수 없는 것이기에, 최초로 주어진 자격이기에 새롭다. -머리와 어깨라는 시에서는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머리 있으니까 더 머리 있으니까”라는 구절이 나오지만 혁명과 철학은 앞서 나오는 ‘두 시간에 십 이만 원이지만 항상 세 시간동안 마사지를 해주시는 아주머니’에 대한 구절보다 결코 더 와 닿지 않는다.-
앞으로 문학계를 대표하게 될지도 모르는, 주목받는 시인은 너무 젊다. 대부분의 권위는 경험과 비례해 증가한다. 그것이 실재하는 경험인지, 단순히 나이 먹은 수치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젊은 시인의 권위는 부족하다. 문학계이든, 영화계이든, 또는 사업을 하는 것이든, 회사이든 간에 경험 부족한 이가 설 자리는 없다. ‘경험을 쌓으려면 회사에 들어가 일을 시작해야 하는 데 회사는 경력직만 뽑더라!’하는 말을 자조적이게 공유하는 시대이기에. 이 세대로서, 실력은 있지만 어쨌거나 너무 새파란 나이의 시인으로서 그는 답을 내놓는다. 어쨌거나 자조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게 자란 이들이라 하여도 그 나름의 생존 방식은 있다. 그렇게 자란 이들도 살아가야 하며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한다. 선배들에게, 선생님들에게 살아온 방식과 정당성이 있듯이 결국에는 우리도 우리만의 방식으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답을 내놓을 것이다. -시인의 시에는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죽었다고 말하는 화자는 분명히 살아있다. 죽어있다고 말하는 우리는 살아남아서 결국 흔적을 남길거다.-
아직은 쭈뼛거리는 우리를 대신해 시인은 평이한 말로 먼저 걸음을 뗀다. 그의 언어로 듣는 일상의 목소리는 익숙하지만 어쩐지 낯설어지고, 아름다워지고, 신비감마저 획득한다. 목동의 삶을 꿈꾸지만 사실 혼자 살 뿐인 우리의 세계는 희지의 세계로 탈바꿈하고 그것은 자조적이지만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고 일상을 채워가다 보면 언젠가 권위적인 오만 조차도 가장 평이한 걸음에 자리를 내놓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