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키튼> 결말, 이상향과 존재 가치를 느끼는 행복
도달하고자 하는 이상향.
그곳에 도달하기만 하면 행복해질거라는
사후적 이상에 대한 꿈을 가지는 건
현재에 만족하라는 태도가 동반하는 폭력성,
지금 이 상태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상황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상쇄시키는 데 효과적이다.
더불어 상황을 바꾸려는 동기를 끌어내는 건 좋은 덤이다.
그렇지만 특정 조건을 전제로 만족과 행복을 뒤로 미루는 것 역시 한계를 지닌다.
조건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 애매하게 규정한 조건이 이루어진다고해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즉, 자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조건을 명확하게 알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조건이 충족시키는 것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만족일뿐 영원한 행복을 보장할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예상할 수 있는 한계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언젠가는 이 정도면 됐다고, 조건의 충족을 인정해야 되는 순간이 올 것이고(물론 그 인정은 힘들거고 불완전할거다)
그 후에도 양보할 수 없는 삶의 문제는 늘 기다리고 있을거다.
그러니 결국에는 카르페디엠이라고 순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이 태도는 비열하다.
이상향은 오로지 꿈과 같은 공간과 시간으로만 이루어져있지는 않을거다.
그렇다고해서 누구나 언제든 쉽사리 말로 선언만 하면 되는 장소도 아닐테다.
18권의 방대한 이야기내내 키튼의 아내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가끔 받지 않는 전화를 거는 키튼의 모습, 유리코에게 건너건너 이야기를 들으며 불안해하는 키튼의 모습만 나올 뿐이다.
키튼은 늘 망설인다. 아내에게 용기있게 얘기하지도 못하고 소식을 전해 들으며 전전긍긍할 뿐이다.
독자에게 키튼은 만나는 사람마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성실한 고고학자이자 프로페셔널한 탐정, 인생의 마스터지만
아내를 향할 때 느끼는 키튼 자신의 모습은 불안한 시간제 강사, 적성에 안맞는 보험조사원일 뿐이다.
키튼이 딸에게 한탄하듯 학계에서 인정받으며 괜찮은 수입이 있는 정교수였다면 망설이지 않았을까? 그 조건만 충족시켰다면?
여전히 그 조건은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키튼은 아내에게 "이 풍경을 보여주고 싶다고",
"이곳에 와달라고", "나는 여기에 있으니까"라고 처음으로 용기내어 말한다.(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처음이다)
키튼이 우유부단하고 망설였던 것은 보여줄만한 성과가 없고 상황이 초라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능력과 상황은 비교당하고 상대적인 것이지만
자신에게 필요한 조건을 아는 것, 자신의 길을 찾는 일은 혼자서 해내고 결정지어야만 한다.
그리고 조건의 충족과 이상의 도달 또한 본인만이 판단할 수 있다.
키튼은 '내가 있을 장소'는 아니었지만 '모든 것을 걸어왔기'에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 자신이 있을 장소를 탐구하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키튼이 도달한 곳은 '아무 것도 나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불완전함을 지녔음에도
키튼에게는 '푸르고 아름다운 곳'이다.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이고 함께 보고 싶은 풍경이기도 하다.
이제야 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이고, 그 이유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드디어 자신이 존재하는 공간이니까.
완벽하게 이상적인 공간은 없을거고 도달하려는 노력 또한 집착일 수 있다.
하지만 이상을 쫓으며 길을 가다보면
적어도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은 만나게 될거다.
존재 이유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행복 정도는 잠시라도 마주하게 되니까
모든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건 허무하지 않다.
이 정도로도 쫓을 이유는 충분하다. 필요충분조건 만족.
+
Sailing Stone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작업했던 "돌 story"
결국에는 다큐를 만들어야 한다는 걸 안다.
다큐멘터리를 완성한다고 해서 엄청난 성공이 보장된다거나
커리어가 알아서 찬란하게 열릴거라고 순진하게 믿지는 않는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이 나에게는 상징과 같은 게 되었다.
내 가치를 구현하고 결과물로 이야기해야 하니까.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어야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을테니까.
겉돌고 모호한 가치들과 생각, 자아를 표출하고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표현을 한다는 건 내가 여기 있다고 외치는 행위니까.
제대로 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만
너에게 보여줄 수 있을거다.
내가 있는 공간을 아릅다게 볼 수 있는 마음을 지니게 될거다.
어쩌면 함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에 있다고, 존재이유가 되는 작품을 만들어야만 살아갈 수 있을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