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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Francia Jun 19. 2024

도서관에서 어린이들과

-이거 반납하고요, 이거 대출해 주세요.

-네, 여기 있어요. 다음 주 수요일까지입니다~


일주일에 하루,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어린이들을 만난다.

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학부모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게 된 덕택이다.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아이들이 다가 북트럭에 올려놓은 책들을 제자리에 도로 꽂아놓는 일이다. 고등학교에서는 도서부 동아리 학생들이 '교내봉사시간'을 받으며 이 일을 거들어 주었는데, 여기서는 모든 책정리가 내 몫이다. 쉴 틈이 없다.


오늘도 들쭉날쭉한 판형의 그림책들을 한아름 들고 800번대 낮은 서가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813.8....835.4....843.5 책이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 꽂아놓고 있노라면 데스크에서 어린이들이 나를 찾기 시작한다.


-선생님~ 이 책 빌릴래요.

-아 네! 지금 갑니다~


도서대출증을 내미는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이 점점 눈에 익는다. 도서관에 오는 아들은 늘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뉴페이스는 드물다. 사람에게는 책을 좋아하는 유전자라도 있는 걸까.


2학년 지우는 오늘도 책을 찾는 책이 있다.


-선생님, 별의 커비 있어요?

-별의 커비는 저쪽에, 이리 와요 찾아줄게요


인기도서의 위치는 이제 파악했다. 흔한 남매, 수학도둑, 놓지마 시리즈, 설민석의 한국사대모험, 엉덩이 탐정, 마법천자문.. 주로 만화책이다. 입구로 들어오자마자 왼쪽으로 꺾으면 만화책 서가가 있다. 그래서인지 도서관에 오는 어린이들 중 많은 숫자가 왼쪽 서가로 사라지곤 한다. 만화책에는 '도서관에서만 읽는 책'이라는 스티커가 붙어있다. 좋아하는 시리즈를 서너 권을 가져다가 쌓아놓고 편안한 자세를 잡은 뒤 책을 펼치는 아이들을 보면 내 기분도 좋아진다.



5학년 유진이는 단연 도서관 최다방문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도서관에 온다. 오늘은 들어오자마자 기대에 찬 얼굴로 묻는다.


-선생님, '나 혼자만 레벨업' 5권 반납됐어요??

-보자 보자.. 아직 반납 안 됐는데."


실망 가득한 표정이 안쓰럽다.


-아.. 오늘까지 일건대.. 그.. 빌려간 사람 알려주시면 안돼요? 제가 가서 받아올게요!!

-아.. 그건 좀.. 곤란한데. 어쩌나..


출자 정보를 슬쩍 보니 6학년이다.


-유진아, 6학년 언니가 빌려갔네. 하루 더 기다려보자.

-네.. 아.. 빨리 반납했으면 좋겠다..


대체 나 혼자만 레벨업은 얼마나 재밌는 걸까.




쉬는 시간, 점심시간, 방과 후. 수많은 어린이들이 도서관에 들락거린다. 조용히 앉아서 학원 숙제를 하거나 학습지를 풀기도 하고, 독서기록장 쓰기도 한다. 만화책이나 그림책을 읽는 저학년 친구들도 있고, 소설책을 읽는 고학년들도 있다.


도서관 문을 밀고 들어오면서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아이들이 있다. 허공에다 대고 기계적으로 인사하는 아이들도 있고, 눈을 맞주치고도 인사 안 하는 아이들도 있다. 나는 그저 도서관에 입장하는 모든 어린이들을 환한 미소로 반겨준다. 어쩌면 그것이 나의 가장 중요한 임무일지도 모른다.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아이들에게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도서관에 오면 언제나 환영받는다는 을 알려주고 싶다. 학교에 있는 어른 구든 안전하다고 꼈으면 좋겠다.



유난히 얼굴이 하얀 서율이가 왔다. 오늘도 머리를 양갈래로 야무지게 묶었다. 오늘 아침에 저 아이의 머리카락을 저토록 정성스레 매만져줬을 누군가의 손을 상상해 본다. 서율이가 주춤주춤 나에게 다가오더니 뭐라 뭐라 말을 한다. 목소리가 작아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 선생님이 못 들었어요. 다시 말해줄래요?


나도 따라 작게 말했다.


-긴긴밤, 이요.

-아 긴긴밤 찾고 있어요?

-네

-어디 보자.. 여기 어디쯤 있었는데.. 여기 있네요!


서율이가 웃으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오늘은 서율이가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으니 나도 말을 붙여보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읽고 너무 슬퍼서 펑펑 울었어요.


서율이 눈이 똥그래진다. 어른이 그럴수가, 하는 표정이다.


-선생님이요?

-네.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였어요.




6학년 규동이는 마루에 앉아서 흔한 남매를 읽고 있었다. 그러느라 자기 가방이 젖고 있는 줄도 몰랐다. 가방 속 물병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던 것 같다. 물이 흥건한 마룻바닥을 발견하고 내가 핸드타월로 닦아내자 당황하며 벌떡 일어났다.


-어어.. 내 가방에서..

-응 괜찮아요. 선생님이 닦을게, 가방이 젖어서 어쩌니?

-아 가방은 괜찮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할게 뭐 있다고. 아이는 연신 미안해하며 종이타월을 더 가져와서는 바닥 닦는 나를 도왔다. 참한 아이다. 이런 태도와 예절은 어디서 배웠을까. 행동이 예쁜 린이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내 딸 보리와 담이도 도서관을 들락거린다. 엄마가 학교에 오는 날, 신이 난 자매는 쉬는 시간마다 찾아온다. 집이 아닌 장소에서 가족을 만나면 왠지 더 애틋하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고는 소리 내지 않고 표정으로 마구마구 반긴다. 내가 학교에 간 첫날, 1학년 담이는 친구들을 우르르 데려와서 말했었다. "우리 엄마야!"



오후 3시가 지나고 도서관이 조금 한산해지면 나도 성인 서가에 있는 책을 골라 펼쳐본다. 최근에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 각본집을 읽고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를 글로 다시 읽는 건 색다른 경험이다. 활자를 통해 장면을 떠올리며, 멈추고 싶은 장면에서는 언제까지고 멈추어본다. 주인공 '동훈' 역할에 너무나도 딱 맞춤이었던 이선균 배우가 아련하다. 선하고 우직하고 착하고 쓸쓸한 동훈. 어서 다음 주에 학교도서관에 가서 다음 회차를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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