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21
“결혼하면 비상금 필요해”
어디에서 누구에게 들었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꽤 여러 사람에게, 심지어 엄마도 그런 소릴 했던 것 같다.
'왜’ 필요한 지보다 일단은 꼬불쳐두고 봐야겠구나... 그래서 결혼=비상금 이란 공식을 암기해왔다. 초졸 이후 수포자의 길을 걸어온 내게 꼬불쳐 둔 돈은 수학의 정석을 마스터한 것 같은 기쁨이었고, 결혼과 동시에 삶의 지혜를 터득한 새댁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종종 시엄마로 빙의한 것 마냥 남편이 너무 귀여워서 “나 꼬불쳐둔 비상금 있는데 그걸로 치맥 시켜먹을까?”, “앱솔루트 피치에 냉채족발은 어떠냐”라고 말할 뻔 한 순간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네 엄마가 아니야 레드썬!” 등을 돌려 의지를 불태웠고 다행히 비상금을 탕진할 만한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때’가 왔다. 비슷한 시기에 퇴사한 친구들, 그 주변 무리에 나까지 합쳐 여섯, 모두 여자였고 목적지는 터키였다. 한때 노트북 배경화면이었던 카파도키아 열기구 투어에 파묵칼레에서 인증샷까지~ 선라이즈 터키!! 결혼=비상금이란 공식이 여기서 빛을 보는구나 싶었다. 귀여운 남편이 카드를 주며 한도를 정해줬고, 나는 꼬불쳐둔 비상금으로 명품지갑에 남편 선물까지 샀다. 상상이었지만 마음은 이미 터키였다. 단톡 방이 만들어지고 총무가 결정되고 터키에서 꼭 사야 하는 쇼핑리스트가 공유됐다. 남편에게 뭔가(?) 미안했지만... 그만큼 더 짜릿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 행복한 시간들이 며칠 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열흘쯤 남았을까 과자를 씹으며 터키 100배 즐기기를 읽고 있는데... 하필이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롯데샌드를 세로로 세워서 씹었고... 오래전 치료했던 앞니가 롯데샌드와 함께 떨어져 나온 것 아닌가. 젠장 할... 인생... 욕과 함께 눈물이 났고 취소수수료.. 결혼=비상금... 여행=타이밍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리고... 꼬불쳐둔 비상금은 여행 대신 새 앞니를 선물해줬다. 그것도 임플란트로... 결혼 6년 차 여전히 터키에 가지 못했다. 이제 혼여는 꿈도 못 꿀 딸이 생겼고 남편은 더 이상 귀엽지 않다. 갈까 말까 고민했던 여행이 아니라 못 가본 유일한 여행이라 이상하게 여행하면 터키가 떠오른다.
이제 꼬불쳐둔 돈도 별로 없고, 여행에 ‘아이’라는 필수조건도 생겼다. 대신 지금처럼 혼자 하는 모든 시간이 나에겐 여행이나 다름없다. 언젠가 카파도키아 열기구에선 사고가 났고 파묵칼레 물이 말라 간다는 리뷰를 봤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터키에 가서 혼자 열기구를 타보고 싶다. 남편 카드로...
그리고 여행을 앞두고 롯데샌드는
절대로 세워서 먹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