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20)
2024년 5월 8일 수요일 (19일 차)
별이 쏟아지던 마을 렐리에고스
어버이날 아침. 오늘은 순례길에서 획기적 사건이 발생한다. 무지함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그 무지로 인한 대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배우는 하루가 되었다.
일찍 잠이 깼음에도 어젯밤 인종차별 발언을 했던 사람이 신경 쓰여 배낭 꾸리는 걸 망설이다 출발이 늦어져 버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이 사람은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별수 없이 소지품을 하나둘 밖으로 이동시키고 복도에서 가방을 꾸린 후 출발하였다. 7시 30분이다.
아침 기온은 6도라는데 제법 쌀쌀하고 손가락 마디가 시리다. 나는 베이스 & 미드 레이어 그리고 경량 패딩과 그 위에 얇은 바람막이 점퍼까지 입고 출발한다. 물론 10시가 넘어가면 모두 벗어버리겠지만··· 그런데 이런 날씨에도 서양인 중에는 조금 있으면 해가 뜰 것이고 그러면 바로 더워지니 차라리 반바지를 입고 출발하겠다는 사람을 종종 본다.
동서양이 참으로 다르다. 추위를 타는 것도 다르지만 더위에 대응하는 방법도 너무 다르다. 서양 사람들은 거침없이 반바지를 입는다. 우리가 반바지를 입고 걸으면 바로 피부 화상을 입는데 말이다. 나는 가능하면 아니 반드시 얇은 긴바지와 긴 티셔츠를 입으라 추천한다. 반팔이나 반바지로 한껏 호기를 부렸다가 피부 화상으로 고생하는 한국 사람들이 저녁 숙소에서 종종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변함없는 메세타 평야를 걷는다. 그러나 지금까지와 다르게 지방 도로를 계속해서 따라가고, 길가에 플라타너스가 심겨 있어 고원 평야라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대자연 속을 걷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여기서부터는 스프링클러 장치들이 즐비하고 지극히 인간 문명 속을 걷는 기분이다. 이제 메세타 길도 이틀이면 끝날 것이다.
한 시간여를 혼자 걸었다. 멀고 긴 길에 앞뒤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외롭다기보다는 평화롭다는 생각이 더 들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혼자라는 생각에 유튜브에서 원더걸스의 ‘노 바디’를 찾아 틀었다. 한참 흥얼거리는데 어느새 300km 대로 줄었고 “언제 가나?” 대신 “얼마 남지 않았네.” 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 점점 아쉬움이 들기 시작한다.
‘엘 부르고 라네로’ 마을에 도착했다. 에너지 보충이 필요한 시점이다. 마을 골목길에 접어드니 저 멀리 ‘라 코스타 델 아도베’라는 카페가 보인다. 한국 순례자들 사이에 유명한 ‘전설의 신라면’ 가게이다.
가게에 커다란 메뉴판이 걸려있는데 누가 써 줬는지 '신라면 5.5유로, 햇반 4.5유로, 젓가락도 있어요! ㅋㅋㅋ' 이렇게 쓰여 있다. 어느 한국인 순례자가 이 가게 주인에게 라면 조리법을 알려주고 메뉴에 포함시켜 놨을 것이다. 나중에 걸으면서 보니 다른 마을에서도 가끔 한국 라면을 파는 곳을 종종 보게 되었는데 모두 한국인들의 영향력이라 생각되었다. 드디어 라면이 나왔다. 비주얼은 별로였지만 라면수프 맛이 어디 가나? 국물까지 싹 비웠다.
식사를 마칠 무렵 한국 어머니 두 사람이 숙소 예약을 못 해 큰일 났다며 도움을 청한다. 학교 선생님으로 재직하다 은퇴하고 같이 왔는데 스페인어, 영어도 못 하니 숙소 잡기가 너무 어렵다고 대신 전화를 부탁한다. 나는 걱정 말라며 호기롭게 대신 전화를 걸었다. 세상에··· 말을 걸자마자 상대방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이런 경우는 필경 상대방이 영어를 모르는 경우이다. 아 이런! 당황스럽다.
마침 카페에 프로판 가스를 배달하러 젊은 스페인 청년이 들어온다. 종이에 숙소 이름과 전화번호, 예약자 이름을 적어 건네주면서 대신 예약 좀 해 달라고 부탁했다. 스페인 청년이 자기 전화로 그리고 스페인어로 하니 바로 침대 2개가 나온다. 이 숙소는 어제 내가 전화했었는데 이미 만석이 되었다며 거절했던 그 알베르게가 아닌가? 사실 이 방법 매우 유용하다. 이곳에서 전화할 때 젊은 스페인사람들에게 부탁하면 잘해 준다. 신용카드 번호는 요구하지 않으니 굳이 불러줄 필요도 없다.
해는 이미 중천이고 이제부터는 뜨거움과의 사투가 시작된다. 바람막이 점퍼와 미드 레이어를 벗고 베이스 레이어 한 장만 걸치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목덜미가 뜨거울 것을 대비하여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허허벌판 메세타를 걸어간다.
저 멀리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걷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저 할아버지는 왜 이 길을 걷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자 눈에 익은 독일 가족들이 할아버지를 보호하며 걷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니 이 사람들은 잘 됐다는 듯 나에게 배턴 터치하고 먼저 가 버렸다.
74세, 토마스 할아버지였다. 뭔가 부자연스러워 자세히 보니 눈이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다. 어렵게 소통해 봤는데 순례자는 아니고 매일 이 길을 걸으며 체력 단련을 한다며 나더러 먼저 가라고 한다. 길에 자갈도 많고 위험할 것 같기도 해서 한동안 같이 걸으며 보호해 드렸지만 결국 나도 할아버지를 두고 갈 수밖에 없었다.
앞서가며 몇 번이고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돌아 보았다. 토마스 할아버지는 여전히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다. 마음이 아프고 뭔지 모를 슬픈 생각과 감정으로 한동안 우울하게 걸었다. 특히 헤어질 때 잡아봤던 그 거친 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앞에 오스트리아 할머니가 천천히 걸어간다. 나는 아픈 다리지만 할머니보다는 충분히 빨리 걸을 수 있었다. 부엔 까미노! 외치고 앞서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 앞에 그 할머니가 또 천천히 가고 있었다. 또 앞질러 갔다. 또 얼마가 지났을까? 그 할머니가 또 내 앞에 있지 않는가? 도대체 이 무슨 일인가? 결국 그 할머니는 오늘 목적지 숙소에서 반갑게 다시 만났다. 나는 빨리 걷고 중간중간 쉬었던 것이고, 할머니는 천천히 그리고 쉬지 않고 꾸준히 걸어온 것이다.
인생이 바로 이것이구나! ‘얼마나 빨리 가는가?’도 중요하지만, ‘얼마나 꾸준히 걸어가는가?’도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어떤 방식이든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거의 비슷했다. 오히려 그 할머니는 도착해서 준비해 온 야채로 샐러드를 만들어 맛있게 먹는 데 나는 지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동안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것이 인생의 승부였다면 과연 누가 이긴 것일까?
작열하는 태양 아래 힘겹게 걸었다. ‘부르고스’에서 안식 후 달래 가며 걸어온 내 발목은 이제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왼 발목에서 오른 발목까지 통증이 전이되더니 어제부터는 허리까지 아프기 시작했다. 허리는 끊어지도록 아프고, 특히 발목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아프다 못해 날카로운 칼로 살을 베는 것 같다.
10여 일간 고통을 참고 걸어왔는데 이젠 더 걷기가 두렵다. 부르고스에서 여러 가지 조치도 취해 봤고 아침마다 출발 전에 웜업도 하고, 침도 맞고, 약도 먹고 젤도 바르고 걸음걸이도 바꿔 봤는데 아무것도 효과가 없다.
쉬었다 가기를 반복했다. 통상 10Km마다 쉬었는데 지금은 몇 Km 걷지 못하고 바로 주저앉는다. OTL. 이제 포기해야 하나?
지금까지 잘 왔고 참으로 멀리 왔다. 이제 내가 할 만큼 했고 더욱이 부끄럽지 않게 해 왔다. 설령 여기서 포기한다 해도 누구도 나무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대중교통편으로 산티아고로 넘어갔다가 귀국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의 통증은 예사롭지 않아 자칫 중병으로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인데 어려움에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건 만용이다. 그래 포기 하자! 일단 순례길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으니 오히려 편하기도 했지만 아쉽고 특히 아픈 다리가 걱정된다. 무슨 큰 병이라도 난 것일까?
멀리 신기루처럼 나타난 ‘렐리에고스’는 아무리 걸어도 도착하지 않는다. 한발 한발 힘겹게 걸어간다. 뒤에 오던 순례자들이 힘내라며 먼저 앞서가고, 나는 또다시 통증과 싸우며 힘겹게 걸었다. 마지막 몇 km는 정말 고통 가운데 몇 m 걷고 쉬고 또 걷다 쉬었다. 소리도 질러보고 화를 내봐도 통증은 그대로였다. 순간 길가에 순례자 무덤이 눈에 확 들어온다. 그냥 이대로 그 옆에 누워 같이 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겨우 겨우 예약된 알베르게 ‘라스 하다스’에 도착했다. 피어싱을 잔뜩 한 주인아주머니는 한국말로 인사하며 반겨주더니 내 꼴을 보고 바로 시원한 콜라를 가져다준다.
뒷마당에 있는 파라솔 아래에 앉아 양말과 등산화를 벗어 널고 그냥 멍하니 있었다. 다리가 아프니 뭐 할 일도 없었다. 마당 잔디에 누워 잠자던 강아지만 반갑게 내 발밑으로 옮겨와 드러눕는다. 외로운 마음이었는데 이름 모를 강아지가 고맙게 느껴졌다.
마당에 누워 강아지와 함께 인터넷으로 산티아고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보니 이곳은 시골이라 교통편이 없고 다음 도시 레온까지는 가야만 했다. 그리고 남은 10여 일을 어떻게 지낼지를 고민하였다. ‘빌바오 미술관’도 들려 보고, 포르투갈 체류 일정을 좀 더 연장해도 좋겠다…… 점심은 포기했지만 저녁은 먹어야 했기에 알베르게 '순례자 디너'를 신청했다. 정말 잘했다. 여기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 테이블에는 8명이 앉았다. 마음은 착잡했다.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한, 아니 이미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니 내일 레온까지만 걷고 순례길을 접어야 한다. 테이블에 앉은 8명은 서로를 소개하고 와인을 곁들여 식사한다. 영국. 미국.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대충 이런 사람들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각 나라 사람에 대한 평가가 뒤를 이어간다. 예의 “한국 사람이 많다”라는 이야기와 “’스페인 하숙’이란 프로그램이 영향을 미쳤다는 데 정말인가?” 물어온다. 내가 와인을 마시지 않고 있으니 옆에 앉은 영국 아저씨가 “피곤할 텐데 와인 한잔 하면 숙면에 도움이 될 거야.”한다. “발목 근육이 너무 아파 알코올을 마시지 않고 있어. 내일 레온에 가면 까미노를 포기해야 할지 모르겠어.” 하고 대답했다.
‘포기’라는 단어에 온 테이블 사람들이 나에게 주목했다. 뭐야! 이 분위기는··· 갑자기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다리 아픈 증상을 물어온다. “처음엔 발목 위 근육이 뭉치더니 이젠 오른쪽도 아프고 통증이 점점 올라가 허리까지 아파온다.” 고 설명하니 이 아저씨가 깜짝 놀란다. "너 죽고 싶니?" 이 무슨 말인가? 자기를 영국에서 온 의사라고 소개한다. 내 증상은 전형적으로 ‘수분과 전해질 부족 증상’이란다.
여기까지 오면서 한국 사람을 만나 보니 정말 물을 마시지 않고, 전해질을 먹는 사람은 한 명도 보지 못했단다. 땀으로 수분과 전해질이 빠져나가면 근육이 돌처럼 굳게 되고, 다음은 경련이 오고, 마지막에는 쇼크가 와서 심장마비로 죽는다는 것이다. 길에서 그렇게 많이 본 순례자 무덤은 대부분 쇼크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이야기한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고 나는 이점에 무지했고 무식했다.
아뿔싸. 열흘 이상 고생하며 울며 걸어왔는데 문제가 수분 부족이었다니. 우리 테이블 화제가 수분 보충으로 넘어갔다. 영국 아저씨는 갑자기 설문조사에 들어간다. 내가 앉은 테이블 8명 중 하루 2리터 이상 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나뿐이었고, 전해질을 보충 않은 사람도 나뿐이었다. 사실 나는 하루에 500ml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고 전해질은 생각도 없었다. 나는 도로변에서 화장실 가는 게 두려워 걷는 내내 거의 물을 마시지 않았고 숙소에 도착해서 조금 마시는 정도였다. 19일째 매우 위험한 판단이었던 것이다.
유독 땀을 많이 흘리는 내가 수분과 전해질을 보충하지 않았으니 소변 이슈는 완벽히 해결되었지만 땀을 워낙 많이 흘렸기 때문에 전해질이 급격히 부족해지고 근육 뭉침 현상과 그로 인한 통증이 발목 근육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그 이후 통증은 오른발로 허리로 계속해서 확산되고 있었다.
뒤 테이블에서 듣고 있던 샌프란시스코 아가씨가 자신이 여유가 있다며 전해질 스틱 3개를 준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빨리 마시라고 재촉한다. 나는 바로 받아서 테이블에 있는 물컵에 하나를 타서 단숨에 마셨다. 나머지는 다음 날 아침 출발 전에 다시 스틱 하나를 물병에 넣어 바로 마시고 남은 한 개를 물병에 넣고 걸어가면서 마시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기적을 보았다. 사실 이건 기적이 아니다. 나의 무식과 무지의 결과이다. ‘무식 (無識)’은 배우지 않은 데다 보거나 듣지 못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뜻이고, ‘무지 (無知)’는 아는 것이 없다는 뜻 이기는 하지만 깨치지 못해서 아는 것이 없다는 점에 초점이 있다고 한다. 나는 무식했고 무지했다. 그러나 이제 배웠다. 실천만 하면 된다. 무식은 배움으로 고칠 수 있지만, 무지는 깨달음이 필요하다.
Copilot에 물었다. “땀을 많이 흘렸을 때 전해질의 효과가 뭔가 알려줘!”
“전해질은 우리 몸의 체액에 녹아 있는 이온 형태의 물질로 나트륨, 칼륨, 칼슘, 마그네슘 등이 포함됩니다. 이 들은 신진대사, 근육 수축, 심장 박동 조절, 신경 신호 전달 등 다양한 생리적 기능을 지원합니다. 전해질 복용의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수분 보충: 땀을 통해 수분과 함께 전해질도 배출되기 때문에, 전해질을 보충하면 수분 흡수가 촉진되고 탈수를 예방합니다.
2. 근육 경련 예방: 나트륨과 칼륨은 근육 수축과 이완에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전해질을 보충하면 근육 경련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3. 에너지 공급: 포도당과 함께 전해질을 섭취하면 빠르게 에너지를 공급받아 피로를 줄일 수 있습니다.
4. 장 기능 개선: 전해질 불균형으로 인한 설사를 예방하고, 장 기능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
천사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날 렐리에고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펼쳐져 반짝이고 있었다. 꼬리가 긴 유성도 유난히 많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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