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21)
2024년 5월 9일 목요일 (20일 차)
왕국의 수도 레온
기적을 맛보는 아침이다. 일어나자마자 발목을 점검한다. 하루 밤 사이에 뭉쳐있던 근육이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다. 나는 빈 물병을 들고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물을 받아 전해질 스틱 하나를 타서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남은 전해질 스틱 1개를 물병에 털어 넣고 배낭 옆에 넣었다. 오늘 15km 이상을 걸어봐야 알겠지만 단단하게 부어올라있던 근육은 가라앉았고 통증은 확실히 줄어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힘을 내어 기분 좋게 출발한다.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라는 소리가 귓가에 속삭인다. 모두 잠든 새벽,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경쾌한 발걸음으로 Camino를 다시 시작했다.
조금 걸으니 내 등 뒤로 붉은 기운이 흘러넘쳐 옴을 느낄 수 있었다. 뒤돌아보니 붉은 노을이 온 들녘에 펼쳐져 있다. 마치 통증을 이겨내고 걸어온 나에게, 기적을 맛본 나에게, 누군가 등 뒤에서 안아주는 듯하다. 이제 완주에 대한 자신감이 확 밀려온다. 진리는 항상 간단하고 단순한 곳에 있었다.
얼마후, 첫 마을 ‘만시야’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카페가 하나 열려 있는데, 내 속 마음에 오늘 아침은 멋진 곳에서 근사하게 먹고 싶어 다른 카페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나, 이 마을에는 문 연 곳이 그곳 하나뿐이었음을 마을을 다 지나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되돌아가 밥을 먹느니 그냥 굶고 가기로 했다. 5km만 더 가면 다음 마을 ‘빌라모로스’가 나오니 그냥 가자.
저 앞에서 한 부부가 강아지와 함께 걷고 있다. 8살 된 강아지와 순례길을 즐기는 중이라고 한다. 작년에 '론세스바예스'부터 '카스트로헤리스'까지 걸었고, 이번에는 카스트로헤리스에서 '레온'까지 걸을 예정이란다. 나와 이야기 나누는 동안에도 강아지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하며 물과 음식을 조금씩 주고 달래는 모습에서 애정이 묻어났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찍었다. 한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매우 다정하게 설명해 주는 이 스페인 부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다음 마을 ‘비야모로스’에 도착했다. 벌써 11km 이상을 걸었고 10시가 넘어가니 이제 옷도 재 정비하고 아침도 먹고 가야 했다. '산 에스테반 성당' 앞 작은 광장에 있는 ‘라 카시나’라는 카페에 앉아 아침을 주문하고 앉으니 아까 만났던 강아지와 스페인 부부가 반갑게 인사하며 지나간다.
두근두근 긴장된 상태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발목을 점검해 본다. 제법 많이 걸어왔는데도 발목은 물론 허리 통증이 나타나지 않았다. 정말 다행이고 감사하다. 한편으로는 억울하고 분했다. 이런 간단한 이유를 몰라 10여 일을 칼로 베는 듯한 고통 속에 거의 울면서 걸었다니···
하여간 이건 특종이다. 모든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마침 순례자 한 사람이 다가왔다. 다리는 괜찮은지 물어보니 어쩌면 나와 똑같은 증상이다. 복숭아뼈 바로 위 근육이 눈에 보기에도 단단하게 뭉쳐 올라와 있다. 나는 입에 침을 흘리며 어제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조금 과장도 섞어서··· '레온'에 가면 전해질을 사서 마시겠다고 카페 냅킨에 스펠링을 적어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고 갔다.
‘빌라렌테’에는 로마 시대에 건설되고 중세 시대에 재건되었다는 다리가 있는데, 근대에 이르러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많은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걸 보면 얼마나 튼튼하게 다리를 만들었는지 칭찬이 절로 나온다.
이제 ‘알토 델 포르티요’ 언덕을 넘어 분지에 형성된 레온에 들어가면 된다. 14km 정도 남은 것 같다. 마지막 언덕을 오르는데 '산토 도밍고'에서 내 발목에 침을 놔주었던 아저씨가 앉아 있다. 침 아저씨도 근육통으로 고생하고 있다며 매일 침을 놓고 있는데 별로 차도가 없다고 한다. 이야기 나누는데 이 사람도 나와 동일한 증상이었다. 결국 수분과 전해질 부족으로 판단했고 레온에 가면 전해질을 사서 보충하기로 했다. 이 아저씨도 근육 통증은 무조건 침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고정관념으로 통증의 원인을 찾거나 제거하려 하지 않고 매일 침으로 통증을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이 지닌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은 때론 엄청난 문제를 만들기도 한다. 이런 불충분하고 부정확한 근거에 기초한 감정적 태도가 예단을 낳고, 점점 더 편파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고집과 편견 때문에 뜻하지 않게 새로운 문화와 발명이 탄생하기도 한다는 걸 인정하지만 말이다.
나는 간단한 처방 하나로 모든 통증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부족했던 자신감과 용기도 배가 되는 현상을 느끼고 있다. 그 영국 의사 선생님의 단 한마디. “물을 더 많이 마시고 전해질도 보충해 줘.” 이 말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
‘레온’은 인구 14만 명의 대도시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군대가 주둔하면서 도시가 형성되었고, 나중에 서 고트족과 무슬림에게 정복당한 후 856년에야 수복되어 레온 왕국의 수도로 번성하게 되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곳은 13세기에 건축된 프랑스식 고딕 건축물의 걸작 레온 대성당, 스페인 건축학의 아버지 가우디가 건축한 보티네스 저택 같은 건축물로 유명한 도시이다. 이것 말고도 구도심 자체가 매우 아기자기하고 수많은 관광객으로 활기찬 모습을 보였다.
나는 구 시청 앞 광장에 있는 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아주 오래전 1996년 어느 여름날, 이 호텔에 묵은 적이 있어 추억에도 남아 있던 호텔이다. 대성당과 보티네스 저택이 가까워 좋고, 먹자골목도 바로 앞에 있어 좋은 위치이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시청 뒤 골목으로 들어가니 미슐랭 가이드 식당이 있다. 나는 여기에서 집 떠나온 지 22일 만에 최상의 음식을 맛보았다. 결국 지금까지 미슐랭 가이드를 상술로 치부했던 나의 편견에 스스로 미안함을 느꼈다.
이곳 레온은 순례자들이 교체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질병이나 체력의 한계로 중도 포기하는 순례자와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 한 번에 800km를 걷기 힘든 경우 2~3번에 나누어 걷게 되는데 부르고스와 이곳 레온, 사리아가 바로 중간 정착역 같이 교대하는 곳이다. 시내에 깨끗한 배낭을 멘 순례자들이 많이 보였다. 논산 훈련소 보충대에서 갓 나온 신병들 모습이다. 모두 긴장과 들떠있는 모습을 숨기지 못해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대성당 탐험에 들어간다. 정식 명칭은 'Santa Maria de Regla de Leon Cathedral'. 성당의 가장 명물은 누가 뭐래도 '스테인드글라스'인 것 같다. 벽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그 자리에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 대체 설계하여 세계에서 가장 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그동안 방문했던 스페인 여러 성당 가운데 가장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보여 주었다.
보티네스 저택은 가우디가 바르셀로나 이외 지역에 건축한 3개의 건물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이틀 후 도착 예정 도시인 ‘아스트로가’ 성공회 주교 궁전인데 이것도 볼 수 있는 행운을 이번 순례길에서 누리게 되었다. 다만, 보티네스 저택은 공사 중으로 건물 사진을 아쉽게도 남기지 못했다.
이 저택은 가우디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친구인 에우세비 구엘의 요청으로 40세에 건축했다고 한다. 중세풍의 특징과 네오고딕 양식의 장점을 모두 포함한 모더니즘 즉, 스페인 아르누보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외부의 디자인에 주목하는 데, 실제 이 건물의 가치는 대성당처럼 과감한 공간감을 주는 내부 설계에 있다. 당시 건축 기술자들이 붕괴될 수 있는 구조라고 반발했다는데 가우디는 사상 처음으로 주철 기둥을 사용하여 내력벽 없이 시원한 개방감을 주는 평면을 구축한 것이다. 어느 시대나 어느 조직에서나 선각자들은 항상 외로운 것이다.
오후 내내 성당 앞 광장 카페에 눌러앉아 있었다. 맑은 하늘아래 성당을 방문하거나 광장을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관광객들을 보기 위해서다. 몇몇 순례자들이 지나가다 반갑게 다가와 인사하고 간다. 어제 전해질을 건네어준 미국 아가씨도 웃으며 다가와 건강 상태를 물어보고 갔다. 침 아저씨도 전해질을 샀다고 이야기해 준다.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나는 일정상 내일 아침에 출발하지만, 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많은 사람들은 레온에서 2박을 하며 피로를 풀고 출발하기 때문에 내일부터는 새로운 사람들을 길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나도 약국에 들러 전해질을 여유 있게 사고, 작은 비누 하나와 로션도 가장 작은 것으로 하나 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너무 거지꼴이어서 로션이라도 발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나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다. 비누는 샤워와 머리 감기, 빨래까지 다용도로 사용된다. 어제 오후까지만 해도 이곳 레온에서 순례길을 중단하고 산티아고로 갈 생각까지 했었는데 지금은 여유 있게 로션까지 장만하고 있으니 하루 사이에 형편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
포기하지 않기로 했으니 호텔에 돌아와 앞으로 남은 여정을 하나하나 다시 점검했다. 가장 급선무는 숙소 예약이다. 이곳부터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에 지금과 같이 매일 전화로 해결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책상에 앉아 남은 일정의 모든 숙소 예약에 들어갔다. 하루 걷기 적당한 간격으로 마을을 선정하고, 그 도시를 중심으로 모든 알베르게, 호텔, 호스텔에 하나하나 전화로, What’s app으로 접촉하여 숙소를 찾아내고 예약했다. 산티아고까지 모든 숙소 예약을 다 마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이제 순례길 2막에 접어든 기분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레온 야경을 구경하기 위해 다시 시내로 나갔다. 10여 일간 애 먹였던 근육통이 사라지니 편안한 마음으로 레온의 밤거리를 골목골목 돌아 구경하였다. 골목마다 맥주를 마시며 피로를 풀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 났다. 가끔 반가운 사람들이 합류를 권했지만 정중하게 거절하고 레온의 밤거리를 혼자 걸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마음까지 청량하게 해 준 저녁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배낭을 꾸리다 배낭 제일 아래 소중하게 넣어두었던 라면을 발견했다. 부르고스 중국 슈퍼에서 구매해 배낭에 넣어두었던 라면이다. 호텔 커피포트에 물을 끓여 ‘뽀글이’를 만들어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두 번째 미슐랭 식탁이 되었다. 평점 별 5개다...
편안한 저녁이다. 나는 오늘 기적을 만나 새 출발을 준비하고 있다. 통증이 사라지자 488km를 걸어온 내 종아리에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근육이 보기 좋게 생겨 있었다. 나는 새 근육과 반갑게 상견례를 했다.
프랑스에서부터 20일 걸려 이곳 레온에 도착해 있다. 지금까지 안전하게 걸어온 그 모든 것이 은혜라! 그리고 천사가 내 귀에 속삭인다.
“새 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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