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인연 들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22)

by Kevin Kim

2024년 5월 10일 금요일 (21일 차)

평화로운 농촌마을 산 마르틴




잘 잤다. 정말 잘 잤다. 너무도 맑은 기분으로 일어났다.

이제 새로운 출발이다. 조만간 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광장에 서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숙소는 주로 알베르게였다. 알베르게의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와 발냄새, 땀 냄새 그리고 서양인 특유의 체취, 스테레오는 저리 가라 하는 코 고는 소리와의 싸움이 매일 저녁 일상이었다. 알베르게에도 1인실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내 차지는 되지 않았고, '도미토리'라고 하는 다인실을 이용하였다. 철재로 된 2층 침대가 2열, 3열로 쭉 늘어선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가격은 10~15유로. 남녀 공용이고 한 방에 적게는 6~10명, 많게는 30~100여 명이 함께 사용한다. 가끔 단층 침대가 배치된 알베르게라도 만나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런데 어젯밤에는 특급호텔의 정말 좋은 침대에서 속옷까지 다 벗고 편하게 잘 잤다.


다시 올 일 없을 것 같았던 레온에 30년 만에 다시 왔다. 언제 또 다시 올 수 있을까? 아침 7시. 사람 없는 레온 대성당 광장을 천천히 지났다. 아쉬워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아침 7시 레온 성당 앞을 지나 순례길에 나섰다


골목길을 돌아가니 왕립 ‘산 이시도로’ 대성당이 보인다. 11~12세기에 건축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건물은 성당이라기보다 사원, 수도원에 가까우며 왕족들을 위한 궁전 교회, 레온 왕국의 왕과 왕비 등 모두 33명의 왕실 일가 무덤과 왕실의 보석, 진귀한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Basílica de San Isidoro (산 이시도로 대성당)


시가지를 한참 걸어 ‘산 마르코스’ 수녀원까지 왔다. 레온이 자랑하는 4대 건축물 즉, 레온 대성당. 산 이시도르 대성당, 보티네스 저택 그리고 이곳 산 마르코스 수녀원이다. 당초 수녀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이후 순례자 병원으로 사용되었고, 감옥. 박물관. 학교. 병원. 관공서 등으로 활용되다가, 지금은 고급 호텔(Parador de Leon)과 교회, 박물관 이 세 가지 용도로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Convento de San Marcos


이제 메세타가 완전히 끝났나 보다. 레온을 빠져나와 1시간여를 걸으니 ‘트로바호 델 까미노’라는 위성 도시가 나오고 계속해서 작은 도시와 공장 지대를 거쳐가고 있다. 프랑스 국경도시에서 출발한 이후 20일간 매일 조용한 시골과 들녘 그리고 숲길을 걸어왔는데 오늘은 도시와 도로를 계속 따라간다. 그동안 순례길에서 느끼지 못했던 매연과 소음, 미세먼지를 느끼는 날이 될 거라며 이 코스는 택시로 건너뛰라고 조언해 주는 사람도 많았다. 이제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순례길의 한 부분 아닌가?


공단 지대를 걷다 보니 멀리 만국기가 걸려있고 순례자들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무슨 행사하나? 하고 가 보니 공장 한편에 잘 차려진 도네이션 바 (Donation Bar)다. 마치 오아시스같이 나타난 이곳에서 즉석 오렌지 주스, 바나나 한 개를 먹고 화장실도 해결하였다. 그리고 정성껏 돈을 내고 다시 출발했다. 참으로 많은 국가, 특히 한국 사람들 다녀간 흔적이 곳곳에 있었다.


‘발베르데’ 마을이다. 마을 초입에 ‘콜마도’라는 아주 작은 카페에 들어갔다. 콜라 한잔과 작은 스낵을 주문하였는데 어? 이거 정말 맛있다. 나는 먹는 것에 목숨 거는 체질이 아니어서 이 글에서도 먹거리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는데, 라면은 제외하고 말이다, 이 가게만큼은 꼭 칭찬해 주고 싶다.

발베르데 마을 초입에 있는 성당 건너편 '콜마도' 카페에 꼭 들러 보시길...


가게에 있다 보니 중년의 한국 사람 둘이 차례로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물은 많이 드시는가? 전해질은 드시나?" 물어봤다. 한 사람은 매우 신경질적 반응을 보인다. "마실 만큼 마십니다!"하고 짜증스럽게 이야기하고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는다. 왜? 잘 모르겠다. 이 사람은 나중에도 몇 번 만났지만 말을 걸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 그렇게 항상 화가 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곳까지 와서··· 지금도 궁금하다.


다른 한 사람은 복숭아뼈 위쪽에 통증이 있어 힘들다고 한다. 바지를 걷어보니 한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설명하고 전해질 하나를 건네주었다. 어느새 순례길의 전해질 전도사가 되어 가는 중이다. 나는 확신한다. 이 사람은 오늘부터 평안해질 거라고··· 그리고 전해질의 효과는 며칠 후 감사 인사와 커피 대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확실히 처음 본 얼굴들이 많다. 레온에서 출발하는 순례자들이다. 신발도 복장도 깨끗하고 걸음걸이도 씩씩하고 모든 게 달라 보였다. 까미노에 새로운 활력소가 제공된 것이다. 조금 전 수줍게 토마토 하나를 건네주고 간 미국 청년도 오늘이 첫날인데 매우 힘들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런저런 질문과 조언을 요청했다. 대부분 숙소 예약과 샤워 그리고 세탁 문제에 대해 궁금증이 많았다.

순례길 첫날이라면... 5월의 스페인 맑은 날은 참으로 걷기 힘들다


300.8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보인다. 이왕이면 800m 뒤에 300km 푯말을 세우고 사진촬영 명소로 만들지?

나는 여기에 설치한 이유를 모르겠다. 의미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 사람과 설치가 편한 곳에 세우는 스페인 사람의 국민성 차이인가?

하여간 정말 많이 왔구나. 나 자신이 대견스럽고, 이 먼 길을 나와 동행하며 주절주절 불평과 하소연을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들어주신 그분께 감사드렸다. 이제 이틀 후면 산악지방으로 들어갈 것이다. 순례길의 마무리 여정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1,515m의 큰 산을 넘고 또다시 1,330m의 산을 넘어 드디어 산티아고로 들어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

300,8Km 남았다. 정말 많이 왔다


앞서간 순례자는 이 두 개의 산을 넘는 것이 피레네산맥을 넘기보다 힘들다고 엄살을 떨고 있다. 그리고 지금 진눈깨비가 내린다며 "단단히 준비하고 오라" 경고한다. 그러나 산을 넘는 고민보다 산티아고가 다가오고 있고, 순례길이 마무리되어 간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먼저였다. 사실 나는 다리 통증 가운데에서도 메세타 대평원이 너무 좋았다. 그 너른 평야는 비가 오면 오는 대로, 해가 뜨면 뜬 대로 매일 다채로운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었고 조용하고 한적한 까미노는 언제나 평화롭고 신비로웠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이런저런 고수를 만나는 것도 하나의 재미이다. 쏟아지는 스페인 태양 아래 국도를 따라 걷는 길은 정말이지 돈 받고는 못 할 노릇이다. 그런데 어느 마을을 지나니 작은 숲과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가 나타났다. 그늘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기분 좋게 통과하고 있는데 한 순례자가 그늘진 땅바닥에 발포 매트를 깔고 코까지 골며 아주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순례길가 잔디밭에 곤히 잠든 순례자


그 옆에 또 다른 한 사람은 등산화를 아예 벗어버리고 수로에 푹 들어가 앉아 있다. 이 순례자는 내일부터 내 이야기에 계속 등장하는 뉴질랜드에서 온 ‘크리스’이다.

이 사람이 '크리스'이다. 우리는 내일부터 산티아고까지 매일 만나는 동반자가 된다


그리 크지 않은 숲을 지나자, 저 멀리 지평선 끝에 오늘의 목적지 ‘산 마르틴’이 희미하게 신기루처럼 보인다. 늘 그랬듯이 이렇게 직선으로 목적지가 보이면 너무 힘들다. 걸어도 걸어도 가까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들 마지막 3km 여를 힘겹게 걷고 있다. 서로 말없이 눈인사만 나눈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너무 힘들단다.

나는 목적지가 보이는 직선도로 걷기가 가장 힘들었다


오늘도 역 주행 순례자를 만났다. 레온에 살고 있다는 이 사람은 ‘세비야’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까지 갔다가, 다시 방향을 바꿔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란다. 자기는 모레면 집에 도착할 거라고 밝은 얼굴로 떠났다. 또 다른 할머니가 걸어오는데, 배낭에 우산을 연결하여 그늘을 만들어 걷고 있다. 이 스페인 할머니 역시 세비야에서 출발하여 산티아고를 들려 자기 고향 ‘프란시아’로 간다고 한다.

1,400Km 를 걷는 할머니


지금 이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까미노는 약 1,000km를 걷는 은의 길(Silver Way)이라는 코스다. 내가 걷는 길, 스페인을 동서로 횡단하는 프랑스 길과 달리 남북으로 횡단하는 코스여서 순례자도 적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혼자 사색하기 적합한 코스라고 소개되어 있다. 결국 이 할머니는 집까지 돌아가면 총 1,400km를 걷는 것이다. 70대 초반은 족히 보이는 할머니가 이 거리를 걷다니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Silver Way (Sevilla-Granja de Moreruela-Santiago) 와 France Way(Saint Jean-Astroga-Santiago)


어제 레온에서 예약해 둔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내 예약은 도미토리였지만 "혹시 1인실이 있어요?" 물어보니 2인실 하나 남았는데 나보고 그냥 혼자 사용하란다. 웬 복인가? 편하게 샤워하고 잔디밭에 빨래를 널고 옆에 누었다. 세상 천국에 온 것 같다. 며칠 만에 근육 통증도 없고 편한 객실에 빨래도 마쳤고 날씨는 화창하고 모든 게 좋다.

맑은 날은 오후에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빨래를 한다


지나가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배가 고프다고 하니 따라오라더니,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포도주 한 병과 돼지고기, 빵 그리고 감자튀김을 내준다. 계산대 위에 ‘하몽’이 있어 쳐다봤더니 하몽도 한 움큼 썰어 주었다. 아무 걱정 말고 한 잔 마시고 푹 자라고 한다. 참으로 기분 좋은 분위기였다. 그러고 보니 식사비도 받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겨운 스페인 아주머니였다.

주인아주머니의 정성이 담긴 하몽


순례자 디너에서 새로운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함부르크에서 온 부부와 오스트리아에서 온 할아버지 그리고 프랑스 아저씨 등 새로운 사람들이다. 어제 레온에서 연박하지 않고 바로 왔더니 만나는 순례자들이 대부분 바뀌게 된 것이다. 오늘 만난 순례자들하고는 결국 산티아고까지 계속되는 우정을 쌓게 된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오신 애나 부부


정말 유쾌한 대화로 저녁 식사를 마무리했다. 나는 순례길에 와서 처음으로 통증 없이 즐거운 하루를 마쳤다. 아프지 않은 것이 얼마나 좋은가? 새삼 감사했다. 그리고 코골이 소리 들리지 않는 방에서 꿈나라에 들어갔다. 아마 나 혼자 엄청 코를 골았을 것이다.


기분 좋은 밤이다. 여기는 스페인 산 마르틴이다.


https://youtu.be/o9rhDuN0D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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