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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그리고 시작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35)

by Kevin Kim

2024년 5월 23일 목요일 (34일 차)

Santiago de Compostela



드디어 산티아고에 들어간다. 어젯밤도 밤새 잠을 설쳤다.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우리 방에 있던 10명 모두, 아니 코를 심하게 고는 한 사람을 빼고 모두 잠을 설치고 있는 듯 보였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라 침대에 누워 출발할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내 옆 침대의 미국 아가씨가 눈으로 이야기한다. “출발하자!” 그래 좋다. “부엔 까미노!”

새벽 안갯속으로 출발한다. 오늘은 마음도 몸도 가볍고 즐겁다


서둘러 나왔다. 어둠 속에 안개마저 자욱하다. 그동안 매일 비가 왔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으려나 보다. 어제 일부러 짧은 거리를 남겨두었기에 "오늘은 천천히 가자" 했는데 아침이 되니 마음이 변했나? 갑자기 조급해진다. 아침 안개가 가득한 거리를 지나 숲으로 들어갔다. 해드 랜턴을 사용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서울 정도로 어두운 숲길을 한참이나 혼자 걸었다.


그러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어둠도 시간이 지나니 점점 밝아오고 나는 유칼립투스 숲 속 깊은 곳에 서 있었다. 눈에 익은 순례자들이 하나둘 나타나고 인사하고 길을 제촉하여 걸어간다.


모두가 상기된 얼굴이다. 아는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두가 밝게 인사하고 신나게 걷는다. 웃는다. 모두 웃는다. 아마 마음속으로는 울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으나 모든 순례자들이 함박웃음으로 서로 인사를 나눈다.

유칼립투스 숲 속에서 잠시 서서 지나가는 순례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제주도에서 단체 관광으로 왔다가 결국 단체와 헤어져 단독으로 걷고 있는 모녀가 지나가고...

제주도에서 단체로 왔다던 모녀


4월 27일 로그로뇨 공원에서 다리 통증으로 벤치에 앉아 있을 때, 비야 프랑카를 빠져나가다 비 오는 길에서 만났던 이탈리아 아가씨가 건강하게 걸어온다.

항상 웃는 얼굴로 반갑게 대해 주던 이탈리아 아가씨


며칠 전부터 함께한 오스트리아 리처드는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산티아고 광장에서 봐! 내가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하며 툭 치고 지나간다. 이 친구도 오늘은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오늘도 모닝 비어를 마셨을까?

오스트리아 리처드


숲 속을 빠져나와 국도변으로 접어들 때 놀라울 정도의 아름다운 일출이 시작되었다. 십여 일 만에 일출을 보는 것 같다. 하늘도 순례길 마지막 여정을 축하해 주기 위해 오늘은 비 내리는 것을 참고 있나 보다.



그리고 10km. 서운함이 넘쳐서일까? 모든 순례자들이 10km 이정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산티아고가 가까울수록 더 빨리 걷는 사람과 더 천천히 걷는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나는 천천히 걷는 사람 편에 들었다

10Km Only


비록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결론은 없었지만 오히려 내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한 다짐과 생각들은 정리된 것 같다. 까미노를 걷기만 해도 해결될 수 있는 고통이나 숙제는 세상에 없다. 이 길을 걷는다 해도 그 고통과 난제와 숙제는 그대로 남아 있겠지만, 그것을 대하는 용기와 다짐은 분명한 변화가 있기 때문에 순례길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걷다 보니 반대로 걸어오는 순례자들이 무척이나 많이 보인다. 생장으로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가? 도착하면 그렇게나 아쉬운가? 의문이 들어 물어보니, 모두 순례길을 마치고 출국하기 위해 산티아고 공항으로 걸어가는 중이란다. 공항버스가 있지만 그걸 타려니 뭔가 서운하고 아쉽고 해서 그냥 걸어가기로 했단다. 12~13 km 정도 거리인데 평상시 이게 가능하겠는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매력과 묘미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싶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도착 후 산티아고 공항으로 걸어가는 순례자. 어느새 나를 앞질러 가는 뉴질랜드 크리스


공항으로 걸어가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도중 크리스가 나를 앞질러 갔다. "내가 먼저 광장에 도착해서 너

광장에 도착하는 모습 찍어 줄게..." 정말 밝은 모습으로 변한 크리스를 보며 내가 신나 했다. 참으로 기뻤다. 제발 먼저 하늘나라에 간 아들을 그리워하되 아픔으로 남기지 말고 추억으로 간직해 줄 것을 기도했다.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산티아고에 들어가기 아쉽기도 해서 조금 떨어진 기쁨의 언덕(Monte do Gozo)에 올라 산티아고를 바라보고 가기로 했다. 이 그리고 언덕에 올라 산티아고 대 성당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서니 시원함과 섭섭함, 감사함과 허탈감이 몰려오고, 육체는 완전히 소진된 기분이지만 정신은 너무도 상쾌하고 충만하니 그것으로 족하다. 순례길을 걸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과 같은? 아니 훈장과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다 와 간다. 천천히 걷자


산티아고 입구에 도착을 알리는 기념물이 보인다. 이제 진짜 끝나나 보다. 이곳에 30일간 나와 동고동락했던 스틱을 내려놓았다. 지난 30일간 제 역할을 충분히 해냈고 표창장이나 은퇴식을 거창하게 열어 주고 싶을 정도로 정이 든 스틱이다. 그러나 이제 이별해야 할 시간이다. 다른 순례자들같이 나도 산티아고 기념물에 스틱을 걸어놓았다.


더 천천히 걸어 산티아고 광장으로 간다. 광장에 들어가는 입구에 왔을 때 다리를 심하게 절면서, 배낭 뒤에 남자 사진을 붙이고 가는 순례자를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사연을 들어보니 자기는 몇 년 전 교통사고로 다리에 철심을 박아서 걸음걸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이런 몸으로 왜 여기 왔으며, 뒤에 걸린 사진은 누구인가 물어보니 동생이란다. 15m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지금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어 이 길을 걸으며 동생을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동생 이름은 크리스토퍼. “나도 네 동생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해 줄게.” 나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성당 순례자 미사에 참석해 동생의 회복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했다.

자신이 장애인 임에도 동생의 회복을 위해 절뚝거리며 순례길을 걸었다



2024년 5월 23일 오전 12시. 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광장에 서 있다.


그렇게 34일간의 대장정이 마무리되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많은 사람이 물어온다. "광장에 도착했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대답을 못 하겠다. 기쁜 건지 슬픈 것인지, 허전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정말 복합적인 마음이 들었다.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광장 바닥에 앉아 있으니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도착의 기쁨과 떠남의 아쉬움으로 모두가 들떠있다



광장 여기저기에서 탄성과 환호성이 들려온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누군가가 다가와 나를 안아준다. 그 가운데 크리스도 있었고, 데니스도 있었다. 리처드가 누군가 소개해 주기로 한 사람은 금발의 애인이었다. 많은 한국 순례자도 만났다. 남편과 사별후 왔다는 이천 아주머니, 전라도 광주에서 오신 중년의 아주머니, 함께 공사 현장에서 일하신다는 두 아저씨, 세계 여행 중이라는 진주라는 아가씨, 다정하기만 한 목사님 딸 한솔이와 하영이. 회사를 그만두고 이곳에 온 장지언 이란 청년, 남미 여행을 마치고 순례길에 도전한 은숙이란 청년, 둘째 날 론세스바에스 숙소에서 만난 어머니와 아들, 침 놓아준 아저씨 그리고 첫날 생장에서부터 함께 걸어온 어느 부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모든 사람이 다 웃는 모습이다.

이 아이들의 미래가 우리나라의 미래일 것이다. 밝은 청년들이 더 많아지길 기도한다


모두가 행복한 모습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사람이 기쁨과 감사함을 느끼고 있음이 너무 좋았다. 감동인지 감격인지는 모르겠으나 광장에 주저앉아 눈물 흘리는 사람들도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이유의 눈물이든 다 귀하게 보였다. 그리고 나도 찔끔 눈물이 나왔다.



그리고, 그렇게 870km, 111만 보를 걸어온 것이다. 출발 초기, 잘못된 판단과 편견으로 물을 많이 마시지 않고 받은 대가는 처절했지만 그것 또한 순례길의 한 과정이었다. 함께 걸어온 내 신발은 너덜너덜, 양말은 구멍이 났어도 내 마음은 남은 인생 여정에 대한 계획과 소망에 관해 꽉 차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믿을 수 있게 되었음도 감사한 수확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데니스 와 자주 함께 했던 프랑스 아저씨


그토록 듣고 싶었던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성경 말씀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매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고 계셨음을 깨닫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이미 듣고 있음에도 들려 달라는 어린애 같은 요청에 웃으며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나의 진짜 까미노는 다시 시작되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 성당에서의 순례자 미사
0 Km ... 끝 그리고 시작.
Buen Camino !


감사합니다 !


https://youtu.be/jAJCABjYeAM?si=Mcc9J2yuWMLwtRQ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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