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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Km를 남기고 순례를 멈추다

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34)

by Kevin Kim

2024년 5월 22일 수요일 (33일 차)

산티아고 앞마당 오 페드로우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고통과 인내 그리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걸어온 순례길을 마감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흔히 시원섭섭하다고 하는데 이건 그냥 서운하기만 하다. 밤새 뒤척이다 배낭을 꾸려 나왔다. 오늘 산티아고까지 들어가면 하루 여유가 있어 좋겠지만 20km만 걷고 산티아고를 아껴 두기로 했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으니, 산도 들도 꽃도 눈에 잘 들어왔다. 또한 내 옆을 추월해 가는 사람들의 얼굴도 찬찬히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대부분 긴장과 기대감을 읽을 수 있었다. 특히 프랑스 생장에서부터 걸어온 순례자들은 이미 30여 일 정도, 800km를 걸어온 터라 마무리를 준비하며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으리라. 내가 지금 그렇듯이···

나를 앞질러 가던 스페인 부인들. 빗속에서도 활기찬 걸음걸이로 멀어져 갔다


그러나 내가 걸어보니 800km 전 구간을 한 번에 걸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자기 여건과 형편에 맞게 100km, 200km만 걷거나, 몇 구간으로 나누어 몇 년에 걸쳐 걸어가는 방법도 의미가 있을 거라 여겨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 구간을 선호하고, 유럽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형편에 맞추어 계획을 구성하고 이곳에 오는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목표가 아니라 목적이란 생각이다. 어떤 젊은이들은 '며칠 만에 완주'라는 분명한 목표는 가지고 있는데 목적이 애매하다. 이곳에 왜 왔는가?라는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목적이 없는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 이곳에 왔고, 이 길을 걸으며 무엇을 하려 했으며, 순례길을 마치고 돌아갈 때 어떤 심경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이유, 바로 순례길의 목적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어느 하루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마감을 앞둔 지금은 서운함에 힘들다


자기 마음에 품은 생각을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정말 천지 차이라는 것을 이번에 절실하게 느꼈다. ‘사리아’에서 출발한 두 자매는 다른 한국 순례자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이 자매들은 시간과 어려운 경비를 들여 짧지만 외국 여행 경험과 친구와의 우정의 시간을 갖고자 이곳 순례길에 온 것이었다. 단순한 해외여행이 목적이었다면 파리나 로마로 갔을 것이다. 이들은 분명한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서울에서 남미 콜럼비아에서 사리아로 입성하여 5일간의 단기 순례길을 온 것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들은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한 한국 자매가 내뱉은 "어머 제들은 100km만 건너 봐"라는 무시하는 듯한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힘들어했다.


얼마를 어떻게 걷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독 공정보다는 공평을 요구한다. 내가 못 하면 너도 하면 안 되고, 내가 하고 있으면 필요 없어도 너도 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가진 자는 비난의 대상이고, 앞서간 자가 타도의 대상이 된다면 그 사회는 더 이상 미래가 있을 수 없다. 너는 너이고 나는 나다. 서로 다른 너와 내가 함께 우리가 되어야 다양하고 건강한 사회가 될 것이다.

오늘도 숲 속을 통과하게 되어 매우 신선하고 기분 좋은 순례길이 되고 있다


이른 아침 빗속을 걷다 보니 "프레군토노'라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예쁜 색상의 카페가 눈에 띈다. 자기 집 앞마당에 일부러 자갈을 깔고, 그 위에 여러 가지 편의 시설을 갖춘 순례자 전용 카페를 차린 것 같다. 아기자기한 장식과 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늘막, 그리고 정말 깨끗한 화장실까지 정말 감동이다. 음식의 맛과 친절은 덤이었다.

이쁘게 꾸며진 카페는 주인의 성향을 보여 준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해서 비 오는 숲길을 걷는다. 비를 머금은 까미노는 미끄럽기 그지없지만, 비 내리는 숲 사이로 걷는 길은 마음을 참으로 편안하게 해 준다. 레온 지방까지는 숲 속에 들어가면 대부분 혼자 걷기 때문에 외로움과 때론 섬뜩한 두려움이 있기도 했었다. 그러나 여기는 사람이 많아 앞뒤에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걷고, 이야기하고, 웃으며 순례길을 즐긴다. 참 보기 좋다.

이 두 사람은 트레일 러너이다. 아마 단거리를 달리기로 즐기고 있나 보다


우리는 매일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심지어 죽음을 향해 뛰어가기도 한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하루를 삶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정말 참된 삶을, 후회 없는 인생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브 잡스는 “만일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내가 오늘 하려고 했던 일을 계속할까?”라고 질문하고 대답이 ‘아니요’가 나온다면 지금하고 있는 일을 중단해야 했다고 말했다.

33Km.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어차피 알지 못하는 죽음의 날, 오늘 하루도 가치 있고 널리 유익한 일에 관점을 두고 살아간다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지 말고 용기를 갖고 내 인생을 살아야겠다. 사람마다 사명이 다르고 맡겨진 역할이 다르니 내가 맡은 일에만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그뿐이다.

네덜란드의 52세 Myra 여사가 두 번째 순례길 완주 후 잠자는 가운데 평안하게 하늘나라 가셨다는 비문...


나는 근육통증으로 고통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감사하게도 물집 한번 잡히지 않았고, 가장 걱정했던 무릎과 발목 통증도 없었으며, 장거리 산행 시 나타났던 고관절 이상 증상도 없이 무사히 순례길을 마무리해 가고 있다. 허리띠는 한 칸 이상 줄었는데 체중은 의외로 거의 줄지 않았다. 오히려 굵어진 종아리와 허벅지가 단단하게 나를 지켜 주고 있어 참 좋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들


10km쯤 걷다 길 옆에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커피 한잔 주문하고 앉아있는데 한솔, 하영 자매가 들어온다. 어제 마을 입구 알베르게에서 잤는데 오늘도 건강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 세대는 어렸을 적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했었다. 그래도 나는 '국토순례 대장정', '남한 일주 무전여행' 등으로 아쉬움을 달랬었지만.. 하여간 요즘 청소년들을 보면 참 부럽다. 젊음 자체도 부럽지만 여러 가지 여건에서 너무 풍요롭고 기회도 많다. 문제는 강인한 정신력과 도전 정신이다. 우리 기성세대가 MZ에게 베풀어야 할 것이 있다면 기회의 보장과 도전 정신에 대한 긍정적 평가라고 생각한다.


산티아고를 불과 19km 남기고 걸음을 멈췄다. 여러 가지 이유도 있지만 남은 거리를 아껴 두고 싶은 심정이 가장 컸다. 한국에서 10,590km 떨어진 이곳에 내가 있다. 나는 무슨 이유로 이 먼 곳까지 와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오 페드로우소' 라는 생소한 마을에서 머물게 되었을까?

한국에서 10,590Km 떨어진 이곳에 와 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산책을 하고 있는데 며칠 전 오 세브레이로와 포르토마린에서 만나고 헤어진 데니스가 지나간다. 여전히 힘겨운 자세로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데니스를 보고 뛰어가서 안아주었다. 안부를 묻고 내일 산티아고 광장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후 돌아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내가 인생을 되돌아보니 후회되는 일들이 참으로 많았어. 인생이 유한하다는 생각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지 몰라. Kevin 당신은 하루하루의 가치를 항상 생각하며 살아야 해.”

순례길을 마친 순례자들이 버린 등산화가 이쁘게 꽃 장식되어 살아났다


놀라운 말이다. 만날 때마다 좋은 말을 아끼지 않았었는데 이제 헤어지는 날이 다가오니 속에 있는 말을 남기는 듯했다. 늘 형님같이 느껴졌던 데니스, 너무 고맙고 감사해서 다시 한번 안아주고 한국식으로 90도로 인사하며 보내 드렸다. 돌아서 오는데 눈물이 나온다. 나에게 충고하고 돌아서는 데니스 눈가에 눈물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이깨나 든 남자들이 헤어지면서 눈물 흘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숙소에서 마지막 정비를 했다. 필요 없는 것을 골라서 버리고 내일은 가볍게, 가벼운 마음으로 걷자고 다짐했다. 지금까지 800km를 넘게 걸어왔고, 그동안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이를 이겨내는 힘의 원천은 육체의 근육이 아니라 오직 기도와 인내였었다. 나 자신을 내려놓고 능력의 절대자와 한 걸음씩 동행하며 대화하고 의지하며 여기까지 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19Km



마무리해야 한다. 이제 까미노가 끝나면 새로운 순례길을 향한 작은 씨앗을 심는 일만 남았다.


https://youtu.be/yks9ATBONY0?si=c630C8_s9CtzLW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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