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나폴레옹이다 (33)
2024년 5월 21일 화요일 (32일 차)
사람보다 소가 많은 도시 아르주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아침에 출발하려는 데 뭔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진다. 얼마 남지 않은 순례길에 대한 아쉬움이다. 거실은 출발하려는 순례자들로 장사진이다. 나도 한편에 서서 배낭을 꾸리고 출발하려는데 비가 제법 내리고 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어둠 속에 두 자매가 걷고 있다. 어젯밤 내게 음식을 나눠 줬던 그 자매들이다. 비 오는 어두운 밤에 젊은 자매 둘만 걷는 것이 마음 편치 않아 같이 걷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또 다른 새로운 인연으로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뉴질랜드 목사님 부부도 만나고, 전도사를 사직하고 왔다는 젊은이도 만났고, 개척교회 목회자 자녀로서 여러 어려움으로 혼란에 빠진 형제도 만나서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런데 오늘 두 자매는 모두 목사님 딸이라고 한다. 참 우연치고는 계속해서 이런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착하고 명랑했으며 때 묻지 않은 젊은 자매들이다. 그러나, 이들도 미래에 대한 고민과 결혼 문제 그리고 젊은 세대와 동떨어져 있는 교회 문화에 대한 고민이 참으로 많았다.
아빠 교회에서 찬양 사역을 돕고 있다는 자매가 가장 상처받은 말 중의 하나가 “찬양은 은혜로 하는 거야.”라는 표현이란다. "찬양은 은혜로 하는 게 아니라 연습과 실력으로 하는 거 아니에요?" 하며 눈을 부릅뜬다. 그래 맞다. 나는 100% 공감한다. 아무리 교회라고 해도 연습도 없이 대충대충 하는 건 아니다. 연습과 노력이 겸비되지 않은 찬양은 오히려 성도들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이 아이는 소위 싱어송라이터이면서 교회 음악 감독을 꿈꾸는 아이다. 요즘 보기 드문 꿈을 가진 아이여서 참으로 마음이 끌렸다.
콜롬비아에서 1년 반 어린이 사역을 마치고 바로 스페인으로 날아와 합류했다는 다른 자매는 결혼을 앞둔 형제가 아프리카 어느 나라 선교사란다. 조만간 결혼하고 새 신랑이랑 미국 애리조나로 유학 겸 사역을 떠나는데 영어가 어려워서 고민이란다. 그런데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크나큰 은사를 가졌기에 귀한 쓰임 받을 것임을 예고해 주었다. 밝고 활달하고 도전적인 청년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미래에 대한 불안과 현실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른들은 "기도해! 도전해 봐, 할 수 있어!" 쉽게 이야기한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말은 정답이 아니라 공감인 것 같다. 이들의 어려움을 인정해 주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도해 주는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 나이 먹고 나서야 이런 지혜가 깨달아졌으니 참 아쉽다.
그런데 이 쪼끄마한 것들이 어찌나 잘 걷는지 모르겠다. ‘카사노바’를 지나 10km 정도 걸어 '레보레이로' 마을에서 커피와 간단한 아침을 함께 했다. 몇몇 낯익은 얼굴들이 들어오고 나간다. 아침을 마치고 조금 더 걸어가니 작고 예쁜 아치형 돌다리가 있는 '푸렐로스'가 나온다.
그리고 곧이어 문어 요리로 유명한 '멜리데'가 나왔다. 이 마을도 10세기에 설립되었다고 하니 스페인의 웬만한 마을들은 모두가 유적이고 유물인 듯하다. 이 마을은 여러 개의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 길과 프리미티보 길 두 개의 순례길이 만나는 접속점에 있다.
그런데 바닷가도 아닌 이 도시가 문어 요리로 유명하다는 것이 아이러니이다. 이 지방에 올리브 오일과 굵은소금, 파프리카 같은 것들이 많이 나오는데, 인근 갈리시아 해안에서 잡힌 문어에 이것들을 섞어 요리하기 시작했고 순례자들 몰려오면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여기저기 식당에서 문어 다리를 들고 순례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낯익은 한국 사람이 식당에서 뛰어나와 여기가 제일 유명하다고 소개해 주어 들어갔다. 흠~~ 우리나라 사람들 입맛에도 잘 어울린다. 그러나 약간의 고춧가루와 구운 마늘 그리고 대파 기름을 곁들이면 더 맛있겠다.
이제 50km 밖에 안 남았다. 다시 숲 속에 접어들어 걷다가 50km 표지를 만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다. 이 아이들과 재미있고 유익한 대화 나누며 걸었지만, 이제 혼자 이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 먼저 가라 했다. "예비하시면 우린 또 만날 것이다!"
숲 속에 있는 작은 벤치에 배낭을 내려놓고 조용히 묵상했다. 지금까지 걸어온 750여 km, 그리고 1백만 보를 넘게 걸어오면서 만나고 헤어졌던 많은 사람들, 자연과 바람, 들풀과 야생화, 하늘을 보다 갑자기 쏟아졌던 그 눈물의 의미에 대해, 메세타 평원과 아무도 없던 숲 속에서 외쳐 불렀던 '하나님' ··· 비록 아무런 목소리를 듣지 못했지만, 내가 해야 했던 기도에 대해, 그리고 내려놓아야 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 잠잠히 묵상하고, 기도하고 일어났다. 잠깐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버렸다. 오늘은 갈 거리가 멀어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비가 다시 온다. 지난 일주일 이상 계속 비가 내려 육체는 물에 젖고 정신도 흠뻑 젖은 느낌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 오는 숲 속에 홀로 앉아 빗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묵상하는 이런 시간은 그동안의 사회생활에서는 누릴 수 없는 기회였으며 오롯이 감사와 임재를 깨닫기에 충분했다.
내 인생의 여정이 50km만 남았다면 어쩔 것인가? 어쩌면 회사에서 은퇴한 지금이 바로 50km밖에 남지 않은 여정이란 생각이 든다. 다시 생각할수록 심각하다. 그런데 숲 속에서 묵상하는 과정에서 내 인생의 마지막 남은 여정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이어진다는 깨달음을 얻게 하셨다. 그렇다. 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내 삶의 발걸음을 지금 순례길을 걷는 마음으로 걸어간다면 기쁨으로 내디딜 수 있겠다는 새로운 소망이 생겼다. 남아있는 50km가 귀하여 느껴지듯 내 인생도 지금부터가 가장 귀한 시간이 될 것이다.
까미노 어느 카페에 쓰인 글귀를 보자. “Blessed are you, Pilgrim. If you discover that the true Camino begins at its end. (순례자여! 당신의 진정한 까미노는 이 길의 끝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건 축복입니다). “ 산티아고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순례길의 끝이 다가오는 것에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나의 진정한 순례길은 이 까미노가 끝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으니, 지금부터는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할 지에 대한 생각과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부지런히 걷다 보니 많은 순례자들 사이에 아까 그 두 아이가 보인다. 탈 없이 잘 걷는 모습도 반갑다. 다시 합류하여 함께 걷기 시작했다. 옆에 말없이 걷고 있는 사람들을 보다가 여기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을 가지고 이곳에 왔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순례길에서 어떤 것을 보고, 어떤 것을 느끼고, 어떤 다짐을 하고 돌아가게 될지는 각자의 몫이다. 이건 순례길을 걸었다고 모두에게 기념품 배분하듯이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구하는 자에게 구해지고, 찾는 자에게 찾아지는 은혜이다.
오늘도 택시 광고는 여전하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를 아쉬워하는 순례자가 있는가 하면, 이 거리도 걷기 힘들어 택시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례자도 있다. 오늘 어느 마을 공동묘지 담벼락에 본 택시 유혹 광고는 매우 메시지가 있었다.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던 그 뱀이 순례자를 유혹한다. “그 길을 완주한다고 하나님께서 뭐라도 주실 줄 아느냐? 그냥 택시 타고 편하게 가면 되는데 뭐 하러 고생해?” 마치 순례자가 이 길에서 느낄 영적 체험을 방해하기 위한 뱀의 공격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이런 달콤한 유혹은 지뢰밭을 걷는 기분이 들었을 정도로 많았다. 그런데 하필 이 그림은 공동묘지 담벼락에 그려져 있었다. 생명과 사망의 경계가 이처럼 우리 주변에 흔하게 있는 것이다. 정말 깨어 있어야 한다. 유혹은 달콤해 보이지만 어두운 터널과 같은 것이다. 이 터널을 지나야 만 비로소 밝은 세상과 아름다운 하늘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조급함에 유혹에 넘어지기도 한다
‘아르주아’에 도착했다. 인구 9천 명 정도 마을인데 사람보다 소 숫자가 더 많다고 광고하고 있다. 무슨 마을 소개 자료에 소가 많음이 자랑으로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함께 걸어온 이 아이들과 맛있게 점심을 먹고 헤어져 숙소로 갔다.
숙소 입구에서 한 무리의 스페인 순례자들이 격하게 환영해 준다. 무슨 재미있는 게임을 하다가 내가 도착하니 이토록 환호성을 질러 준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이것이 순례길의 재미인 것 같다.
알베르게 로비에 들어서니 오스트리아 리처드와 오스트레일리아 교포 부인이 아예 맥주 파티를 하고 있다. "리처드, 아직까지 '모닝 비어' 하고 있나?" 했더니 깜짝 놀라 달려온다. 반갑게 인사하며 나에게도 합류하라고 초청한다. 잠시 앉아 이야기 나누다 먼저 일어나 방으로 올라가 샤워하고 정비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늘도 근육 통증 없이 무사히 걸었다. 감사함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도 30km를 넘어 제법 먼 길을 걸어왔음에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한 조치라고는 물을 충분히 마셨고 매일 전해질을 챙겼다는 것뿐이다. 생명수라는 말이 있듯이 물은 우리에게 정말 생명을 담보해 주는 중요한 물질인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모든 이여! 제발 물을 소중히 여기시기 바란다.
이제 이틀만 가면 끝이다. 내일 하루에도 충분히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겠다 판단했지만 순례길을 마치는 것이 아쉬워 이틀로 잘라 가기로 했다. 이길 끝에서 낮아짐을, 내려놓음을, 잊힘을 결단하고, 여기에 더해 아름다운 미래를 향한 나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게 된다면 내 인생의 진정한 순례길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어느 시인이 노래했다. 낮은 자리 앉으므로 높은 자리에 서고, 뒷자리에 서므로 앞서가는 가게 된다고···
https://youtu.be/_-APqmJ8hxU?si=9aj1k1iPClyHCRe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