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서 판단하고 살아갈뿐이죠.
마케팅 공부는 끝이 없고,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이사를 준비하면서 현관문에 손톱이 찧이는 바람에 손톱이 전부 자랄때 까지 피멍을 보며 길러내야한다. 이사를 마친 주말 서래마을로 걸어가서 엄마랑 아빠랑 가구 쇼핑을 나갔다.
정말 예쁜 오브제들 천국이었지만 이미 얼마인지 얼추 아는 이쁜 것들은 가격에 감탄만 머금을 뿐이다.
그냥 아이쇼핑만 하고 나와야지해서 유럽에서 왔지만 합리적이고 튼튼한데 내 눈에 착 감기는 가구들 몇가지를 사왔다. 진짜 가구는 어딜가나 거품이 엄청 끼여있는 것 같다. 이쁘다 하면 돈의 가치가 똥이 되었구나 싶을만큼 비쌌다. 차라리 명품을 사지 했는데 내가 아는 샤넬백은 500만원즈음으로 생각해쓴데 요즘 샤넬백이 1000만원이 넘는다고 해서 어? 나 대학교때 신문에서 500만원이라던데? 했더니 10년전이야...라고 이야기한다.
캐나다에서 보고 배운 색감에 대한 감각을 총집합해 우리 집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이것 저것 사지 못했다. 모든 것은 로봇청소기가 움직이기 쉽도록 거실에 러그도 안깔고, 최소한의 물건들만 두었다. 친구들이 강제로 집들이를 하라고 해서 정말 몇주간은 집들이만 줄기차게 하면서 느꼈다. 나 친구 없는 줄 알았는데 친구가 많구나. 친구들이 하나같이 우리 집에 와보곤 이야기한다. 너 진짜 맥시멀리스트인줄 알았는데 진짜 역대급 미니멀리스트다. 난 맥시멀을 바란적도 미니멀을 추구한 적도 없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 중에 애착관계가 형성된 몇가지만 미친듯이 사모으고 쟁여놓을 뿐 나머지는 명품이든, 아니든 아무런 관심이 없다. 심지어 커튼도 내가 한달에 한번 뗐다 붙혔다하면서 빨 거 아니면 아예 비염과 먼지 예방차원에서 안다는 걸 선택할 정도였다. 그리고 베일에 가려져있으면 우리 집 뷰의 초록이들을 보지 못해 커튼을 열기 답답하다.
업무에 있어서 거들먹거리는 것은 지양해야하지만 우리회사가 업계 최초로 컬러 렌즈를 런칭하여 성공한 이력이 있는만큼 다른 업체들에서도 경쟁으로 따라하고, 우리도 좋은 제안들을 받고 있지만 역시 두번째 나의 컬렉션도 무난하게 성공했다. 네이밍부터 전체 디렉션은 너무 재밌다. 이럴땐 내 친한 친구들이 왜 게이인가, 그들만큼이나 한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극도로 까탈스럽고 이유없이 ugly하다고 외치는데 이런 까다로움이 제품을 성공시키는 열쇠이기도 하다. 부지런하게 더운 여름날에도 15분을 도란도란 걷다보면 반포한강에 다다른다.
신기하게 새도 있다. 늘 자주 찾았던 한강인데 목동과 다르다. 전세로 오면서 하... 과연 매매할수 있을까? 목표는 잡았지만 집값이 너무 쎄서 늘 버거움만 한가득이다. 어릴땐 브런치가 너무 좋았다. 내 별명이 브런치 마니아라고 친구들이 브마라 불렀다. 근데 이젠 저런 음식들을 자주 못먹는다. 왜냐하면 늙어서 일년에 한번씩은 몇일간 쎄게 체하고, 넘치는 식욕과 급한 성격이 내 소화기능을 따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찾아서 먹기엔 그냥 몸에 좋고 부담안되는 슬로우 푸드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감튀와 제로콜라 절대 못잃어... 르누아르의 색감은 보기만해도 기분 좋다. 핀터레스트에서 이 작품을 보고 유화로 그려봐야겠다 했는데 유화는 커녕, 간단한 낙서를 할 심적 여유가 주워지지 않았다.
지난 여름 일요일 저녁 루틴은 집에서 한시간 반을 부지런히 걸어 예술의 전당에 들리는 일이었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땀을 흘리고 음악 분수에서 내 피같은 세금을 조금이나마 누리고 있구나 생각하고 또 집에 와서 버블배스로 샤워를 했다. 나는 조화는 싫어한다. 생화를 좋아하지만 금방 시드는 단점이 있다. 집에 뭘 놔두는 걸 안좋아하고 계속 신경써야하는 건 극강의 효율로 대체한다. 그래서 토요일에 일찍 눈을 뜨면 고터 꽃시장에 걸어가서 예쁜 꽃들을 구경하고 사진도 찍는다. 가격을 물어보지도 않고 한바퀴 찬찬히 둘러보고 자린고비마냥 배부르다 생각하고 비파티세리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테이크아웃해서 집으로 돌아간다. 꽃을 사는 것 까진 좋은데 일주일의 시간동안 꽃잎이 떨어지는걸 치우고, 또 물 이틀에 한번은 갈아주고 시들면 정리해서 버리고 하는게 보통 수고로움이 아니다. 그래서 이 꽃병에 레고 꽃을 조립해 인테리어템으로 집에 조화가 주는 답답함을 레고꽃?! 하면서 신박함으로 바꿨다.
뿌듯한 우리 렌즈, 잘되서 6개월만에 원데이도 출시됐다. 나는 백억 이백억 부자를 꿈꾸는 게 아니다. 이렇게 늙어서 정갈하게 옷입고 미술관 다니고 한 쪽 옆구리에 신문을 끼워 카페에서 아침에 신문을 함께 보고 책을 읽고 문화와 예술을 향유하는 삶을 그린다.
어느순간부터 육회를 진짜 좋아라 하기 시작했다. 근데 혼자 먹으면 맛이 없고 약간 모자란 듯 시켜서 감칠맛나게 맛있고 신선하게 먹어야 맛있는 것 같다. 나에게 허니버터 브레드를 안내해준 애증의 커피나무, 대학교 1학년때 나는 애들이 그냥 이거 먹자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알겠다 했는데 지나고 나니 다들 대학생이라 돈 없어서 양많은 거 나눠 먹자는 의미에서 그걸 시켰다고 했다. 13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런 신경전과 뒷 이야기들을 듣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정말 내가 좋아라하는 분야 빼곤 무디고 무신경한 사람이다.
아주 가끔씩 달달한 음료를 먹곤 한다. 근데 혈당 스파이크 오르는 것도 싫고 그냥 기분만 내고 싶어 한 두세입 마시고 버린다. 그걸 다 마시면 살찌고, 이후에 식탐 오르고, 그러면 다이어트 하는데 더 돈 쓰는데 차라리 이걸 버리는게 싸게 친다 생각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미쳤다고 한입충이라고 대놓고 욕을 한다. 자기들이 대신 먹는다한다. 그러면서 진짜 철없이 자랐다고 한다. 나의 빅픽쳐는 미래를 생각했을때 지금 조금 그 달콤함의 욕구를 채우고 버리는게 나중에 다이어트 약을 먹고 또 살빼느라고 드는 수고로움보다 더 싸게 치는 것의 계산일 뿐인데 말이다.
인간은 단편적인 것들만 보고 상대를 파악하고 계산한다.
한국인들의 단점인 judgemental이 이런데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무리 이런 의도라고 이야기해도 자기들 생각에서 받아들일 공간을 남겨두지 않는다.
이사 온 집에서 푸른 하늘과 녹음을 실컷 봐야지 했는데 지하철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저 방에 들어가질 않는다. 오전 7시~7시 30분전에 눈을 뜨면 침대에서 해가 예쁘게 뜨는 걸 보는데 정말 황홀경에 접어들만큼 행복감이 올라간다. 삶의 지수가 30%이상 윤택해짐을 느끼는 것이 예쁜 뷰인 것 같다. 이 뷰를 늘 감상하기 위해서 얼마나 나는 치열하게 돈을 모으고 집을 매수해야할지 버겁긴 하다.
이로써 생각의 꼬리를 물다가 강남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하다보면 요즘 친구들과 나눈 '온실'이라는 아젠다에 집중하게 된다.
그들은 100억, 500억 부자를 바라지 않는다. 본인의 부모들로 부터 물려받은 혹은 본인이 온 인생을 받쳐 일궈놓은 강남이라는 공간에서 본인들 자식들 역시도 이정도의 부와 여유를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교육시키고, 일한다. 친구 하나가 나에게 나를 오래 지켜보아하니
넌 너 뿐만 아니라 니 친구들도 거의 온실 속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것 같아
정말 그 말을 듣고 대충격에 휩쌓였다. 나는 정말 해외출장가서 고생도 많이 하고 따뜻한 온실의 상징인 대기업을 몇군데나 내 발로 박차고 나와서 스타트업에서 그 회사를 키우고 또 내 자신의 강점을 살리기위해 처절하고 치열하게 노력한게 어떻게 온실이라고 생각할수 있는지 억울하기 까지했다. 최근들어 강남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이 내가 온실이라는 워딩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면 공통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 "
쑤, 전 온실속에서 자라왔고 저는 제 삶도 제 자식의 삶도 그 따뜻한 온실 속에서 키울거에요. 그럴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는게 우선순위고요.
나에게 있어 온실은 유복한 삶 그 이상이다. 아니 나는 온실을 원하지만 단순한 온실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게 내가 강남사람이 아니기 때문이고 지방에서 올라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했다. 애초에 20살때부터 통학거리와 모든 것들을 나 혼자 해결하고 부모님의 지원이 풍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창시절의 친구도 실컷 못만나고, 집안일부터 이사도 자주 다녀야했고 학업뿐 아니라 신경 쓸 일 투성이였다. 하지만 강남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그 출발점이 달랐고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랐다. 나는 안전함을 원하지 않는다. 안전함도 좋지만 안전함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위에 더 큰 성공과 부를 위해 달려간다. 물론 그 도전 속에서 잠시 바닥을 찍는 힘듬도 있겠지만 정신력으로, 그리고 바른 생각과 태도, 꾀 부리지 않고 일확천금을 바라지 않는 요행을 부리지 않는 나의 온전한 능력과 마인드로 중무장해 다시 점프온해 내어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온실을 뚫고 나는 더 큰 온실, spacious한 식물원쯤 되는 쾌적함을 원한다. 강남사람들이라고 해서 다 그 온실 안에 갖혀만 있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체로 그들은 그 온실을 벗어나지 않고 유지하기 위해 삶에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 주말 이른 오전 예술의 전당 카페나 주중 퇴근시간대의 킴스클럽에서 브런치를 먹는 가족단위의 그들을 보면 내가 말하는 그 온실에서 얼마나 힘들고 치열하게 이 삶을 그들은 유지하는지, 적나라함을 확인할수 있다. 그들에겐 강남이 고향이기 때문에 지방 사람들이 서울 살이가 지치면 고향에가서 치유하는 것 처럼 그들은 고향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인 이유도 있을터이다.
작년 5월 5일은 우리 가족에게 가장 큰 불행과 충격이 된 날이다. 그래서 저 아이스크림 사진을 보면 너무 슬프다. 무려 스시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아빠는 급한 전화한통을 받았고 그 날 나는 살면서 부모님의 가장 아연실색된 표정과 허탈과 좌절을 보았다. 그리고 결혼은 나이가 되서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왜 필요한지, 결혼은 정말 내 삶에 필요한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정말 경악할만큼 버거운 일 앞에서 우리 가족은 똘똘 뭉쳤다. 서로를 위해주고 물심양면 함께 울어주고 웃겨주고 곁을 내어주었다. 우리가족 단톡방은 내가 서울을 떠나 온 뒤부터 항상 매일같이 서로의 안부와 점심 식사 메뉴를 공유하는 대화의 창이었다. 다들 기함할 만한 수준의 끈끈함이었지만, 결혼한 동생도 부모님에게 힘이 되어드리고 싶다며 회사에 휴가를 내고 늦은 밤까지 정신력으로 겨우 버텨내는 아빠를 5분 10분 웃게 하기 위해 우리는 더욱 단단히 뭉쳤다. 그렇게 웃어 넘기고, 가장 솔직하게 위로하는 시간들로 인해 기적처럼 많은 것들이 복구되었고, 6개월이 지나지 않아 모든 삶은 정상으로 돌아왔고 더 큰 기회들을 맞이하고 있다. 정말 큰 위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이 이리도 중요하구나 뼈저리게 느낀 교훈이었다.
나는 어릴적 부터 남들보다 성숙하고 멋진 어른이 되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들을 해왔다고 자부했다. 이쯤이면 꽤 멋진 어른이라 생각했는데 늘 셀프미러링을 통해 내가 고치고 삶을 살아나가는데 내 스스로가 조금 더 수월해지는 방법들을 찾고 또 배워나가는 중이다. 아직도 온전한 나로 만들기 위해선 갈 길이 멀어보이지만말이다.
예전엔 앞뒤 생각해서 여러가지 변수들을 고려하고 해야할 말이 있으면 그 시기가 적기라고 생각하면 내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해야 직성이 풀렸는데 이젠 내 마음이 정리가 되지 않아 정말 해야할 말이라도 말실수 할것 같을땐 메모장에 써둔다. 그리고 그 생각의 흐름을 되짚고 다시금 생각한다. 그 후 시간이 한 참 지나더라도 내 마음상태와 생각들이 좀 정리가 되면 조금 시기가 늦고 뒷북이더라도 그 때 찬찬히 말하곤 한다. 그러는게 나중에 후회도 덜 남고 나도 현명했다 생각도 들었기때문이다. 세상살이 온전하고 완벽하고 싶지만… 그런 욕심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주고, 또 조금 내려놓고 지금 당장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조급함과 압박을 내려놔야 아쉬움이 덜 남는 결과를 내가 더 담담히 맞이 할수 있고 문제의 처리능력의 완성도가 보다 올라감을 느낀다. 사업을 하다보면 내 나이에 비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빠르게 느끼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그게 부의 축적이나 리스크 테이킹의 장단점을 떠나 가장 큰 장점이자 자산인 것 같다. 오늘도 조금 더 온전한 나를 마주하기 위해 살아간다. better me, better life! you deserve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