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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캄프카 Jun 09. 2021

사람이다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


답기. 각종 역할들에 주어지는 기대치다. 기대치라는 말이 이미 함의하고 있듯 외부에 의해 결정된 기준을 가지고 평가가 이뤄지는 개념이다. 여기서 애매함이 발생한다. 기대치는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한 행위에 대한 평가 기준이다. 하지만 이는 보통 사람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사람을 평가하는 행위가 옳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만 떼어내서 던진다면 누구에게 제시하던 거의 동일한 대답이 돌아올 거라 예상할 수 있다. 칸트가 이야기했다고 한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라고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고. 사람을 평가하는 행위는 사람의 지위를 결국 수단으로 격하시킨다. 하지만 인류가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 살게 된 후에 기대치가 없는 사회가 존재했을까? 특히나 현대 사회는 더 분업화되고 더 복잡해지면서 개인의 역할이 중첩되게 됐다. 즉 받게 되는 기대치가 과거에 비해 어마하게 늘었다. 하지만 이 역할 수행에 동반해서 따라오는 기대치를 없앨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다. 그럼 이 역할에 대한 기대치를 사람에 대한 평가로 넘어가지 않게 제한할 수 있을까?


답기는 또 일반적으로 덕목이 아니라 의무가 된다.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나라에서 조금 더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답기라는 틀에 맞지 않는 사람을 제대로 평가해 주지 않는 분위기, 다양성에 배타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그 이유다. 누군가는 이 답기를 배제하며 살고자 하기도 하지만 사회 전체에서 그리고 일부는 전통적 가치관에 기대어 만들어진 기대치기 때문에 여기서 완전히 벗어나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사람들이 많이 쓰면 퇴화되지 않는다. 답기는 사람들이 참 애용하는 도구다. 과거에는 생존을 위해 타인을 빨리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었고 현대에는 여기에 여러 가지가 이유가 더 덧붙여졌다. 업무나 공적인 일에서 타인에 대한 파악은 경제적, 사회적 성취와 직결될 수도 있다. 조금 더 사적인 영역에서는 자신의 기쁨이나 행복감을 위해서 혹은 언젠가 있을 필요에 의해서 타인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하는데 답기는 이 과정에서 시간의 절약과 정보의 확실성을 담보해 준다. 점점 더 개방적 인식이 자리 잡으면서 다양성에 대한 이해는 높아지고 반대로 답기를 강요하거나 강제하는 분위기는 많이 줄어들고 있으나 여전히 사담에서나 미디어에서 이 답기와 관계된 이야기는 대화를 뜨겁게 달궈준다.


평가나 틀은 종종 사람이라는 가치를 후순위로 미루게 만들곤 한다. 이렇게 살아야 하고 저렇게 행동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마땅히 이런 일은 해야 하고 등등. 우리는 누구나 사람은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다고 생각하지만 뒤돌아서서 이 평가나 틀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사람답지 않은 녀석’이라는 비수를 던진다. 당위적 가치로서 프로그래밍된 바대로 사람이라는 가치가 소중하다고 하지만 결국 어떤 잣대로 사람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개체가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그럼 사람이 사람답기 위해 필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그건 시스템에 걸맞은 사람이고 그에 부합하게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세팅이 되면 사람은 도구가 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사람을 평가하는 시스템은 ‘악’이고 개선해야 할 대상이고 각종 ‘답기’를 강요하는 분위기는 척결해야 할 문화로 끝맺음이 된다. 하지만 이는 가능하지도 않다. 이미 인간이 문명이라는 것 위에 안착하여 삶을 영위할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을 평가하지 않은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지금까지 이래 왔으니 바꿀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회를 전반적으로 뒤집은 여러 사건들의 본질은 분배다. 그것이 권력이든 자본이든 분배의 질서가 바뀔 때 사회적으로 거대한 사건들이 일어났다. 인류 문명이 항상 떠 앉고 있는 문제는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에 있다. 그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회 시스템은 그 구성원들을 평가할 수밖에 없다. 물론 답기의 인식은 이와 완벽하게 싱크로 되어있지는 않지만 이 평가의 파생상품 같은 거다. 그러면 뭐란 말인가. 그냥 이러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 주절댔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


사람이다. 이런 모든 체제와 구조를 인정하더라도 사람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은 내려가지 않는다. 그것이 단순 구호에 불과하거나 긴 역사적 흐름에서 ‘형성’된 인위적이고 이상적 가치에 불과하더라도 우리는 인본주의적 과실을 맛보았고 교육받았고 이를 상식으로 탑재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단지 이를 작동시키지 않을 뿐이다. 더 높은 이윤이나 더 확실히 앞서기 위해서 그렇게 작동을 멈춘다. 하지만 사람이다. 사람이 배제되고 평가와 답기만 만연한 사회는 앞서도 말했듯 척박해진다. 그렇게 되면 뿌리가 약한 개체부터 죽어나간다. 뿌리가 강한 개체들은 개체수의 감소로 더 많은 자본이나 영향력을 소유할 수 있으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들은 소수이고 다수는 용을 써도 절대 그 지위에 오르지 못한다. 죽어나간 개체로부터 퍼진, 그리고 용을 써도 오를 수 없는 산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허탈함은 비통함의 씨앗으로 심어진다. 사회 곳곳에 그러한 씨앗이 심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면 누군가가 또 죽어나간다. 죽음은 사회를 통째로 말살시킬 수 있는 강력한 현상이며 이를 조장하는 원인은 철저히 배제시켜야 한다. 사람이어야 하는 이유다.


사람은 생각한다. 그리고 행동한다. 이유가 있다. 그게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다.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의 이해도에 따라 우리는 타인을 평가하지만 일단 그 이유는 무조건 존재한다. 그 사실: 생각을 하고 이유가 있는 행동을 한다는 것. 이것만 알아도 우리는 사람을 중심에 놓을 수 있다. 그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그 가치판단으로 이야기, 혹은 다툼을 해 볼 여지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생각이 없고 이유가 없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는 개체에게 우리는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극단적으로 가면 우리는 그에게 인간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이다. 어렵지만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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